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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의수박 Feb 07. 2023

치앙마이 한달살기, 도시산책자의 하루

이 작은 도시에 우리는 왜 열광하는 걸까

총 책임을 맡았던 프로젝트가 성황리에 잘 마무리됐다. 연임에 대한 고민을 안 한 건 아니지만 기꺼이 내려놓길 선택했다.


있는 힘껏 달려온 나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고, 그 생각에 도달하자 너무나 설렜다. 이건 근 십 년 동안 내가 나를 위해 선물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해보자! 이 나이에 가장 큰 선물이라면 당연 시간과 돈일터.


나는, 나를 위해 통 큰 선물을 했다.  2023년 시작이 시간과 돈이라니, 웃음이 절로 나는 단어가 아니던가.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보상이고 그 주체가 나라는 것도 신났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으니 이 정도는 누릴 수 있는 거 아닌가? 내가 나를 위해 기꺼이 쓰기로 한 선물을 결정하고 나니 모든 것이 수월했다.


두어 달 그러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에 가서 나를 던져놓고, 여행경비는 아낌없이 1천만 원을 소진해 보는 거야.


그 첫 시작은 당연히 치앙마이였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첫 직장생활에 도망치듯 나와 떠나왔던 치앙마이였고, 그 후 마음의 안식처처럼 종종 생각나던 곳이었다. 2017년 그해 겨울이 치앙마이에서의 마지막 기록이다. 아마 그대도 나는 퇴사를 앞두고, 생각을 정리하러 이 도시로 떠나왔었다.


이번엔 좀 여유있게 머물러 보기로 한다. 한달살이다. 배낭대신 캐리어를 끌고, 허리띠 졸라매던  옛날 배낭여행족이 아니다. 게스트하우스 대신 적당한 호텔을 뒤졌다.


한달살이를 하기로 마음먹고 다른 사람들처럼 콘도를 고민해봤지만(장기여행자는 호텔보다 콘도 등이 훨씬 저렴하고, 빨래나 간편조리 등을 할 수 있는 콘도를 선호하는 편이다) 내가 좋아하는 올드시를 산책하기 좋은 장소에 적합한 곳을 찾기도 쉽지 않았고, 나는 무엇보다 올드시성곽을 주 단위로 '살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식은, 일주일 단위로 호텔을 숙박하며 머물기다. 타패게이트와 치앙마이게이트, 창푸악게이트 등 성곽의 거점들을 정하고 동네를 휘적휘적 돌며 산책하며 좋았던 거리의 인상을 수집했다. 그렇게 일주일씩 나는 짐을 쌌다.


밤 11시가 다 된 시각, 치앙마이 공항에 도착했다. 후텁지근한 이 습도, 그래. 더운나라구나. 생경하면서도 익숙한 공항 풍경. 모처럼 여행에 신나 캐리어에 잔뜩 붙힌 스티커, 내 캐리어가 나왔다. 아니 그런데, 환영인사가 몹시 거칠구나 이거.


아작난 캐리어 손잡이


말로만 들어봤지, 내 캐리어가 작살날 줄이야. 가끔 짐을 내동댕이치며 캐리어 바퀴며, 손잡이가 망가지는 여행후기를 읽어보긴 했는데, 운 나쁘게도 내가 걸려들었다. 새로 장만한 내 캐리어의 손잡이 한쪽이 완전히 뜯어져 나왔다. 고개를 돌려 도와줄만한 항공직원을 찾아봤지만, 아무도 없다. 허허.


일단 숙소로 가보기로 한다. 찜찜한 마음을 가득안고. 여행자카페에 글도 올려보고, 인터넷에 검색해봐도 캐리어 훼손은 생각보다 흔한 일이고 항공사에서 보상을 해줘봐야 기껏 1만원(그것도 저가항공일 경우 모른척 하는 경우가 많고), 여행자보험은 돌아가서나 보상 받을 수 있으니.


꼼짝없이 나는 망가진 캐리어 신세인가. 그러기엔 오늘이 여행 첫날이고, 나는  두달 장기여행자인데? 아이고.


별 수 있나 싶어 포기하고, 불편한 짐 옮기기를 하길 두어번.  


그 도시의 인상은 사람이다.


첫날 묵은 님만해민서 올드시로 옮기고, 두번째 숙소를 체크아웃 하는 날.


계단에서 끙끙대며 캐리어를 이고지고 내려오는 나를 안쓰럽게 보던 숙소 직원이 도와주러 올라왔다. 부서진 캐리어 손잡이로 인해 엉거주춤 짐을 옮기고 있던 터라, 직원은 안쓰럽게 캐리어와 나를 번갈아 살펴봤고, 공항에서 당했다(!)는 내 표현에도 웃지 않고 망가진 캐리어를 계속 살펴봤다.


혹시나 싶어 그분께, 혹시 캐리어 손잡이 수리점을 아느냐고 아직 여행일정이 아주 많이 남았는데 너무 불편하다고 말씀드렸더니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본드와 드라이버 등을 챙겨왔다.


설마, 혹시, 이거 고칠 수 있는 건가?


캐리어 안쪽에 지퍼를 열어보더니 부러진 손잡이 부분에 순간접착제를 바르고 드라이버로 몇 번 슥슥 돌리더니, 채 5분도 안돼 캐리어를 수리해줬다.


그렇다. 며칠동안 나를 골치아프게 했고 남은 여행기간 동안 이 캐리어를 어찌해야 하나 고심하게 했던 캐리어를, 본인의 일도 아닐텐데 시간과 마음을 써 수리해주신 거다.


어찌나 감사하던지. 연신 감사인사를 드리고, 작은 성의라도 표현하고 싶어 팁을 드렸더니 거절하시다가 받으셨다. 동료들에게 돌아가 환하게 웃으시길래 조금의 안도와 함께, 이 도시가 확- 좋아져버렸다.  


아, 시작이 좋아. 찡찡거렸던 마음은 눈녹듯 사라졌다.


한국은 연일 눈이 온다는데, 폭설로 비행기도 안뜬다는데, 이 나라 지금 34도다.  여기가 대한민국 치앙마이인건가. 여기저기 한국인들이 참으로 많다. 길가다 절반은 한국인이다. 우리, 정말 여기, 사랑하는구나.


카페에 앉아 멍 하니 바깥을 구경하고 있으면, 다양한 여행객들이 눈에 들어온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어르신들이 보이고(그럴때마다 엄마 생각이 났다.), 어린 자녀와 함께 여행 온 모녀여행객들도 눈에 띄었다.


여행 초반엔 몰랐는데, 2주쯤 넘어가니, 왜 이토록 이 도시가 편안한가 생각해봤는데. 사람들의 표정이 참으로 좋았다. 여행객이나 원주민들이나 모두 웃고 있었고, 여기 온 이래 시비거는 소리나 싸움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그건 참으로 놀라웠다.


편하구나. 도시의 안정감을 느끼는 방식은 모두 다르겠지만, 나는 사람들의 온화함과 너그러워진 마음에 들어왔다. 태국사람들은 언제나 친절했고, 가끔 시끌벅적한 여행객들이 있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모두 편안해보였다. 우리가 이 도시와 사랑에 빠지는 이유가 아닐 수 없다.


아무것도 안하려고 이 도시에 왔지만, 정말 아무것도 안하게 될 줄이야.


 강박적으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해내던 과거의 내가 머쓱해질만큼, 스며들고 있다. 고심하거나 생각하는 것도 잠깐 멈춰본다.


멍 하니 자연을 느끼고, 발길 닿는대로 산책하고 그늘을 찾아 움직여본다. 좋아하는 과일을 끊임없이 먹다가, 이러다 배가 터지는 거 아닌가 몰라. 혼잣말도 해보다가. 금새 또 다시 오늘은 뭐 먹지? 오늘은 뭐하지? 이런 생각들로 하루를 느슨하게 꽉 채우다보면, 뻐지근한 다리를 움켜쥐고 핸드폰을 보면, 아. 오늘도 2만보.


분명, 아무것도 안하는데. 나는 오늘도 쉼없이 무언갈 했나보다.



온전함이란 단어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디선가 읽은 구절인데,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라더니, 하나씩 경험을 보태 앎을 다시 써내려 가는 중.


온전한, 하루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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