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다ᆢ 백석
벌어진 창호틈으로 찬바람이 술술 들어오고 방안에 있어도 코끝이 쨍하게 시려운 한겨울쯤
잠은 안오고
달빛인지 가로등빛인지 모를 불빛이 방벽을 비추고
거기다가 정원의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흰벽위에서 흔들흔들 그림자 춤을 추면 퍼뜩 무서운 생각이 들었을거다
아니면 방 벽지가 원래 이런 무늬였나?
무늬를 따라 낯선 느낌으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보느라 정신이 더욱 말똥말똥해지던지하던
겨울 밤들이 내게도 아마 있었을거다
그럴때 시인 백석은 흰바람벽에 영사기를 돌리듯 상상의 나래를 폈나보다
겨울밤이 참 잘어울리는 백석의 시~.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