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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 Jul 11. 2023

할머니 보내드리는 길 1.

(발달장애인 동생과 함께 하기) 동생과 노인장기요양보호사.

할머니를 멀리 보내드리며,

화가 난 일들이 참. 많았다.


올해 할머니는 급격히, 기력이 떨어지셨다.

갑자기.

손을 쓸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처음 할머니가 기력을 점차 잃어가시고

삶에 대한 의지를 서서히 놓으실 때

많이 힘들었다.


<최대한 감정적인 부분을 배제하고,

발달장애인 동생과 함께 하며 발생되었던

현실적인 문제들만 쓸 수 있도록 하겠다.>



올해 설 연휴도 무사히 보내고 나서,

봄이 다가오자 할머니는 기력을 잃으셨고,

거동조차 힘들어하셨다.

매일 할머니는 누워만 계셨다.

식사를 하실 때도, 아예 안 하실 때도 있을 만큼.


발달장애인 동생은

그런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했다.

여전히 가족들의 도움을 필요로 했고

여전히 해맑게 천진난만했다.

여전히, 문제 행동도 계속되었고.


우린 할머니를 돌보아 줄 '요양보호사'를 신청하기로 했다.

동생을 돌보면서 아프신 할머니까지 돌보기엔

가족들이 너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런데 '요양보호사'는 신청이 참 쉽지 않았다.

요양보호사를 집으로 신청하려면 우선 할머니는 장기요양등급을 받으셔야 했다.


먼저, 아는 분이 계셔서 사회복지사 분은 빠르게 오셨지만,

장기요양등급 신청은 아무리 짧아야 몇 주, 길면 한 달도 걸린다고 하셨다.

신청하고, 실사 나오고, 의사소견서 제출 후, 판정하는 회의를 걸쳐 통보된다.

그 이후에 요양보호사님을 매칭받을 수 있다.


가족들이 돌보아야 할 최중증 장애인이 있다고 해서

장기요양등급을 받는데,

배려받을 수 있는 부분은 전혀 없다.

(우선적으로 선정 대상이 된다거나, 하다못해 긴급으로 판정받을 수 있게 한다거나, 혹은 먼저 시행 후 회의라던가 하는.)


그 사이, 장애인 돌봄, 어르신 돌봄 등은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오롯이 가족의 몫이었다.


동생은 여전했고,

할머니의 보살핌까지 추가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 가족은

할머니 발인 날 때쯤. 통보받았다.

 (요양등급판정완료. 요양보호사신청가능 같은 내용. 몇 등급이라던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마 내 답변도 "아. 이미 돌아가셨습니다."였던 것 같다. 아, 우편으로도 왔는데. 할머니 돌아가시고 정리하면서 열어보지도 않고 처분한 것 같다.)


전화를 받고,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더라.

이미 돌아가신 후, 판정결과를 통보해 주다니.

할머니의 진행속도는 급격히 진행되는데,

한 달에 2번 열 리는 회의. 그 시간에 맞아야 판정받고, 그 이후에 가능하다니.


물론 우리 할머니가 특이하게 빠르게 진행되는 경우일 수 있다.

하지만 어르신들의 시간은 그렇게 여유롭지 않다.


무엇보다 장기요양등급은 6개월 이상 병상에 계시는 경우라 하셨는데

우리 할머니는 6개월 전부터는 기력이 떨어지신 정도였고,

2~3개월 전부터 완전히 거동이 힘들어지셨다.


장기요양등급을 신청 후,

판정받기 전까지 우린 사비로라도 '요양보호사'님을 구하기로 했다.


하지만, 장애인 가족이 있는 집에 노인을 돌보아줄 요양 보호사님은 안 계셨다.


장애인 가족이 있을 뿐,

동생과 마주치지 않을 시간대.

가족들이 모두 자리를 비워야 하는 시간대에 할머니를 돌보아 줄 요양보호사님을 찾는 건데도 힘들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는

장애인 가족이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겨우  와주실 분을 구할 수 있었다.


만약 사비로 구하기 힘든 경우라면,

오롯이 가족이 있어야만 한다.

우린, 구해지기 전까진

고모들, 삼촌, 이모할머니 모두 동원되었었다.


그때도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은 마냥 즐거워했다.


매일 집에 번갈아 가며

고모가 오시고,

삼촌이 오시고,

매일 죽을 사 오고...

아마 명절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동생이

거동이 불편해지신 할머니를

일으켜 세우거나,

보채거나

할까 봐 걱정했는데.


의외로 동생은 할머니 방 근처에 가지 않았다.

동생은, 무언가를 눈치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낸 지도 몇 주가 채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눈에 띄게 힘들어하셨고,

사설 구급차를 동원해 미리 말해 둔 병원으로 가셨다.


아마, 여기까지 읽고

"그런 상황이면 미리 병원에 가시지! 진즉 요양병원으로 가시지!" 하는 분들 계실 것이다.

우리 할머니는

그렇게 병원 가시길 거부하셨다.

특별히 아픈 곳 없으시다고.

절대 안 가신다고 싫어하셨다.

기력이 떨어지시기 직전까지도 아주 건강하셨다.

얼마 전까지도 집안 제사와 명절 등을 직접 손으로

준비하시고 다 하셨으니까.


그리고


아마도, 짐작건대,

임종을 집에서 편하게 맞고 싶으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요양병원이나 요양원 역시

장기 요양등급이 있어야 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물론 없어도 되는 병원도 있었다. 집 근처병원은 판정받고 오길 바라셨지만,)


병원에 가서도 장기요양등급이 나오지 않아

욕창용 매트를 구하며 참... 그랬다. 힘들었다.


그렇게 병원에 가시고, 간병인을 구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병원에서 눈을 감으셨다.




(2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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