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빠르게 내달리는 산책
부끄럽지만, [런던 거리 헤매기]는 나의 첫 버지니아 울프다. 생각보다 작고 얇은 이 책을 통해 상당히 많은 생각을 하게 되어서, 버지니아 울프를 이제야 읽게 되다니! 한창 읽는 도중 스스로를 좀 혼냈다.
최근 가장 인기 있는 글의 장르라고 하면 단연 에세이가 아닐까. 때로는 일기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감상의 느낌이 들기도 하고, 읽기도 쉽고, 쓰기도 쉬운(?) 에세이야말로 가장 환영받는 장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사실 나에게 에세이는 그렇게 선호하는 읽을거리는 아니다. 에세이 같은 글을 혼자서 종종 쓰긴 하지만-지금 쓰고 있는 이 독서 기록도 어찌 보면 에세이에 가까운 형식이지만- 다른 사람의 에세이를 읽는 것을 썩 즐기는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읽기로는 소설이나 시, 희곡, 시나리오 등 픽션 장르를 좋아하고, 구입하는 경우도 소설이 아니면 두고두고 공부하기 위한 전문 서적뿐이다. 소장용 만화책도 있지만 글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므로 패스-
뭐 읽기야 읽긴 하지만, 아무래도 말한 것처럼 요즘은 에세이의 홍수 시대이니만큼 수많은 글들의 향연에서 나를 사로잡을 글들을 찾기 어렵다고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요즘 젊은 한국 작가들의 소설이 어찌나 재밌는지! 에세이에서 매력을 느끼기란 더더욱 어렵다고 자평하고 있던 찰나, 이 책을 만난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다가 머릿속에서 전구가 반짝하게 되는 순간이 있는데, 이 책은 읽는 내내 아주 번쩍번쩍했다. 이게 바로 산문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의식의 흐름 기법의 대표주자라고 한다. 이 산문집에는 그러한 표현 기법의 정수가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제일 처음에 실린 산문 '런던 거리 헤매기'부터 그냥 '장난 없'다. 산책하러 떠나는 순간부터 산책을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오는 순간까지의 생각과 느낌을 담은 글인데, 읽는 내내 내 다리가 아니라, 뇌로 산책을 하는 기분이랄까? 뇌가 정말로 뛰어다니는 느낌. 문장의 이쪽 끝부터 저쪽 끝까지를 말 그대로 깡총깡총 활보하는, 오랜만에 정말 머리를 써서 읽었다는 느낌이 드는 글이었다. 굉장히 리듬감이 이는 표현과 단어의 사용이랄까. 원어로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공감할 소재도 많았다. [충실한 벗에 관하여]를 읽으면서는 어린 시절 함께 했던 개들이 떠올랐고, [거리의 악사]는 완전히 내가 자주 가는 거리의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다. [서재에서의 시간]을 통해서는 나의 독서 습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이외에도 여러 모로 공감하고, 또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들도 있었지만, 가장 와 닿은 것은 [로저 프라이 추모 전시회]다. 아마 전시회 때 사용한 개막 연설문인 것 같은데, 친구인 로저 프라이에 대해서 이토록 잘 알고 있는 버지니아 울프를 보면서 내 친구 'ㄹ'이 떠올랐다. 종이 위에서, 피아노 건반 위에서, 컴퓨터 화면 위에서 10년이 넘게 나와 함께 하고 있는 내 친구. ㄹ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예술가이다. 가장 예술가라는 말이 이상한데, 무튼 그렇다.
학부생 때 과제로 어떤 시도를 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문화비평학을 연계전공하고 싶어서 관련 수업을 찾아 듣던 중이었고, ㄹ은 서양화를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평소 ㄹ의 작품을 보러 학교 작업실에 자주 놀러 가기도 하고, 그의 전시회를 보러 가기도 하고, 무엇보다 같이 살면서 -나는 당시 ㄹ의 집에서 하숙 아닌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림을 매일 보고 있었으므로 -ㄹ의 방은 거의 갤러리 수준이었다- 그렇게 가까운 내가 ㄹ의 첫 번째 비평을 해주자! 는 프로젝트였다. ㄹ의 작품을 비평해보고, 그 텍스트를 두고 함께 이야기해보는 방식으로 진행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수업의 학점은 그냥저냥이었지만(과제 점수는 기억이 안 난다) 적어도 나는 그 시간 매우 즐거웠다. ㄹ은 어땠나 모르겠지만, 이후로도 우리는 여전히 많은 일을 함께 하고 있다.
이 [로저 프라이 추모 전시회]를 읽고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예술과 비평의 관계에 대해서 열심히 생각하던 지금보다는 어린 나에 대한 추억, 어렸을 때부터 계속 그림 그리는 길을 걷는 ㄹ에 대한 감상, 또 한 사람의 예술가를 곁에서 지켜보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심정 같은 게 마음속에서 뒤섞이면서 아련한 향수마저도 느껴졌다. 언젠간 나도 버지니아 울프처럼 내 친구를 위한 멋있는 연설문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갖게 됐다.
자기만의 방의 필요성을 역설한 버지니아 울프, 이 책에서는 방에서 안전함을 느끼는 것만큼이나 넓은 세계를 탐험하는 것을 사랑한 그의 열정적 일면을 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연대의 중요성을 느끼며 책을 마무리했다. 나의 방을, 방을 채운 가구를, 누구와 공유하고, 어떤 조건에서 공유하게 될 것인가?
도서명: 런던 거리 헤매기: 버지니아 울프 산문집
지은이: 버지니아 울프
출판사: 민음사
발행연월: 2019.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