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헤센 주 카셀의 빌헬름쇠헤 산상공원을 오르며
제목이 너무 거창할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 이럴 때는 사람의 언어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 얼마나 제한적인지 절실하게 깨닫는다. 허접한 사진 몇 장으로 그곳의 아름다움을 담아낼 수는 없겠다. 기록은, 망각의 무거운 기운에 어떻게든 맞서 보려는 그냥 몸부림일 뿐이다. 언어적, 기술적 표현 너머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상상하는 사람의 몫이다. 독일의 아름다운 도시 카셀Kassel에 자리 잡은 빌헬름쇠헤Wilhelmshöhe 왕궁 공원의 이야기를 하려는 참이다.
카셀은 이번 여행의 일정에는 없던 도시였다. 우리 가족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스위스 인터라켄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루체른을 벗어난 후 얼마 안 되어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탔던 차는 완파되고 우리는 구급차로 실려갔다. 부상이 있었지만 사고에 비하면 다행스러운 수준이었다. 루체른의 병원에서 사흘을 입원한 후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가 친구 집에서 머무르며 몸을 추스렀다. 스위스 일정은 다 취소되었지만, 한국으로 돌아가기까지 남은 기간 동안 가까운 지역들을 돌아보기로 했다.
우선 프랑크푸르트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거리인 마르부르크Marburg의 친구 가족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하룻밤을 보냈다. 그다음 목적지를 위해 아내의 폭풍 검색으로 찾아낸 곳이 이곳, 발음도 다소 어려운 빌헬름쇠헤 산상공원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가족이 거기서 보낸 반나절의 시간은, 있는 동안에도 즐거웠지만 우리 가족사에 오래오래 남을만한, 회상할수록 여운을 남기는 그런 시간이 되었다.
이곳은 궁정(宮廷 또는 宮庭. 여기 말로 schloßpark)이다. 왕이 살고 있지 않으니 현재로서는 공원에 가깝다. 공식 명칭은 빌헬름쇠헤 산상공원(山上公園, Bergpark Wilhelmshöhe)으로 되어 있다. 빌헬름쇠헤라는 이름에는 언덕(shöhe)이 들어가 있다. 궁전이기도 하고, 정원이기도 하고, 공원이기도 하고, 산이기도 한 이곳을 뭐라고 한마디로 명명하기가 참 애매하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곳이었지만 나름 유명한 것 같다. 독일의 미술사학자 게오르크 데히오Georg Dehio는 이곳을 가리켜 “바로크 건축사에 있어서 조경과 건축의 가장 웅장한 결합”이라고 칭송했다는데 말이 어려워 감이 오질 않는다. 2013년에는 UNESCO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가벼운 옷차림으로 조깅과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고, 한쪽에는 오토 캠핑장이 있었다. 넓은 초원에 금가루를 뿌려 놓은 듯 수없이 많은 민들레가 피어 있는 곳을 동네 공원으로 둔 카셀 시민들이 부러웠다. 그런 정경에 우리도 공간을 소비하는 관광객이 아니라, 공간의 일부인 여행자로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부산하게 서성이다가 어느새 찬찬한 걸음으로 산책을 즐기게 되었다.
입구의 안내문에서 대략 공원의 규모를 확인하고는 한 시간 넘게 걸을 작정을 한 터라 서두르지 않았다. 그렇게 두 남매와 아내의 뒤를 밟으며 가족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과 카메라에 담았다. 좌우에는 아름다운 숲이 둘러싸고 있고, 눈 앞에는 사랑하는 가족이 걷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한 아버지에게 분에 넘치는 행복이다.
여기서 가족의 뒷모습을 찍으며 걸었던 시간은 교통사고 때문에 스위스와 영국의 가든 투어 계획이 무산되면서 적잖게 상심했던 마음을 치유하기에 충분했다. 치유의 숲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숲은 치유의 능력을 지녔다고 믿게 되었다.
일단은 나무가 참 컸다. 사람을 겸손하게 했다. 어떤 포근함마저 느꼈다. 낯선 곳이었지만 커다란 나무 아래서 가족은 오히려 안전해 보였다. 숲에서, 커다란 나무들 아래서 느끼는 경외감은 어떤 언어나 개념으로 전달될 만한 것이 아닌 것 같다. 불현듯 신의 임재를 인식한 것처럼, 그렇게 숲에서 뜻밖의 각성을 경험한다.
그 아래서 마음껏 달음질하고, 민들레 꽃씨를 후후 불고, 돌멩이를 던져보기도 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절대자의 품에 안긴 듯한 안정감을 느낀다. 보일 듯 말 듯, 아내와 아이들이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서 오락가락할 때는 어떤 희열도 느껴졌다. 갈등과 화해는 인격의 숨바꼭질이다. 가깝다고 안전한 게 아니고, 떨어졌다고 불안해할 것도 아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주어진 인생의 길을 성실하게 가고 있는 순간이 소중할 따름이다.
‘졸졸졸 흐르는 시내’라는 상투적인 묘사가 여기서는 실재였다. 아름다운 호수에는 고니가 알을 품고 있었고, 조금 더 큰 호수 저편에는 둥근 지붕의 건축물이 신비롭게 서 있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곳이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을 가장 극대화시킨 곳이라는 느낌도 든다. 사람도 동물도 편안해 보였다. 이렇게라면 더불어 사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다.
수로인지 도랑인지 이름을 붙이기는 애매하지만, 가장 높은 곳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이끄는 이 작은 물길은 이 공원에서 가장 인상 깊은 곳 중 하나였다. 돌 틈새로 피어난 민들레와 이름 모를 야생화를 보느라 한참을 쭈그려 앉아 있었다.
아치형 다리 아래로 아름다운 폭포가 떨어진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요정의 도시, 리벤델을 연상시키는 곳이다. 이곳 만으로도 하나의 완성된 공간으로 충분할 것 같은데, 빌헬름쇠헤 산상공원에서 이곳은 하나의 점에 불과할 만큼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곳을 돈 한 푼 내지 않고 즐길 수 있다는 건 가히 은혜로울 지경이다.
울창한 숲 사이로 목적지가 보인다. 산 꼭대기에는 저렇게 생긴 건물이 있고, 첨탑 꼭대기의 흐릿한 동상은 바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Hercules의 동상이다. 이 산상공원의 건설이 시작된 것은 1696년. 그리고 저 동상은 1717년에 처음 세워졌다. 300년의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공원. 나무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고, 경관이 수려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것은 그 시절 조경을 하던 사람들이 공원의 미래를 세월에 맡겼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숲과 나무, 호수와 시냇물에 취해 한참을 올라왔다. 이제는 무수한 돌계단을 올라야 했다. 어른도 아이도 숨을 고르며 찬찬히 계단을 올랐다. 가끔씩 뒤를 돌아보면 펼쳐지는 광경에 탄성을 지르다가도, 고개를 높이 들어야 겨우 볼 수 있는 헤라클레스 상까지 올라갈 생각에 한숨을 내뱉기도 했다. 돌계단은 중앙의 물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나 있고, 주변 축대엔 야생화가 즐비했다.
딸아이가 바싹 마른 돌에 붙어 있는 달팽이를 발견했다. 여기서 비를 기다렸나 보다. 아니면 물 축제가 한창일 때, 이 거대한 수로에 물이 풍부할 때 왔다가 눌러앉았나 보다. 가만히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니 꿈틀꿈틀 발을 내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도 보이니 이 넓은 세상이.” 달팽이의 귀를 빌어,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질문을 해 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빌헬름쇠헤 산상공원의 백미는 물 축제이다. 산 전체를 아우르는 이 공원은 사실 커다란 물 정원이다. 헤라클레스의 발 아래서 터져 나온 물이 돌계단 중앙의 수로를 따라 궁전 앞의 호수까지, 갖가지 오묘한 광경을 펼치며 흘러내려오는 물의 향연이 펼쳐진단다. 숲과 정원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시간이었지만, 물 보러 다시 한번 오고 싶어졌다.
돌계단을 다 오르면 동상을 받치고 있는 커다란 건물이 시야를 막는다. 옥타곤이다. 거길 통해 동상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가지 않기로 했다. 공사 중이라서 많이 어수선했다. 10년째 공사 중이란다. 음료수나 마실 생각으로 꼭대기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 앉은 김에 메뉴를 살펴봤다. 이런 전망 좋은 곳 치고는 음식값이 아주 저렴했다. 피자와 스파게티로 든든하게 배도 채우고 피곤한 다리도 어루만졌다.
카셀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노란 유채꽃밭도 보인다. 풍력 발전기도 여럿이다. 그리고 시선을 조금 당기자 우리 가족이 함께 걸었던 길이 펼쳐졌다. 거기서 엄마는 무산된 스위스 일주의 아쉬움을 달랬고, 아빠는 영국의 정원 대신 독일의 공원에 감탄했다. 두 남매는 나무들 아래서 웃고 울고 장난치고 싸우기도 했다. 사고에 놀란 마음은 여전하고 다친 곳이 나으려면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다. 그러나 가족은 이 숲과 나무들 속에서 큰 위로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