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달력에서 만난 보뱅과의 대화

크리스티앙 보뱅

by 무쌍

꽃이 없는 쓸쓸함이 익숙해졌다.


맘껏 피어나던 나팔꽃은 검은 씨앗이 되고, 작은 흰꽃이 무수하게 터지던 풍성덩굴은 침묵하듯 멈추었다.

한낮의 태양이 내리쬐도 베란다는 서늘하다. 매일 들여다봐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 화분 틈에 붉게 빛나는 방울토마토 몇 개가 나를 안심시켰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초록 기운을 조금이라도 보고 싶어 야생의 들판처럼 그냥 내버려 두었다. 다시는 생생하지지 않을 것 같은데도 조금씩 목을 축이는 정도로 흙을 적혀주고 있다.


몇 해전 레몬차를 만들다 빼놓은 씨앗들을 잘 말렸다가 화분에 심었다. 열개도 넘게 넣었지만 딱 두 개가 싹으로 돋아났다. 늦봄부터 부산스럽게 가지가 쏟구치더니 이파리 사이로 가시를 뽑아내며 레몬 나무가 되려고 버둥거리는 듯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꽃은 피우기커녕 아직도 싹만 내놓고 초라한 잎 몇 장을 펼쳐 심드렁해하는 레몬나무 같다. 글을 발행할 때가 되었는데 어떤 작가를 만나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도서관을 향하며 누구든 내게 말을 걸어줄 거라는 기대를 했다.



서가에서 파란색 책 하나가가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다시 보뱅의 책 앞에서 마음이 뜨거워졌다.


프랑스에 태어난 그는 작가의 유명세는 뒤로하고, 고향 근처에 숲 한가운데 있는 집에서 글을 쓰는 일에만 일상을 보냈다고 해서 더 관심이 갔다. 각종 문학상을 휩쓸고, 문단에서도 그리고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작가였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는 세상에 없는 후였다. 크리스티앙 보뱅은 아쉽게도 2022년 별세했다.

프랑스 일간지 르탕은 고인을 가리켜 "어떤 이들에게는 위대한 시인이었고, 다른 이들에겐 낯선 작가였다"라며 "고인은 자신의 명성 따위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고, 숲 안 가운데에 있는 집에서 오로지 글쓰기에만 전념했다."라고 평했다.


그를 알게 된 것은 어느 해 겨울이었다. 이미 세상에 없는 작가가 남긴 책을 펼쳐 들었을 땐 그가 아닌 그녀라고 믿었다. 책 속의 화자가 대부분 여자라서 그랬는지, 에밀리 디킨스를 위한 <흰옷을 입은 여인>을 썼다는 것만으로 판단해 버린 나는 형편없는 독자였다.


스로 자책했다. 나에게 있는 편협한 생각들이 부끄러웠다. 아름다운 글이었고 아주 사적인 글들은 작가의 것인데 그것을 내 마음대로 단정했다는 것에 말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읽은 일도 노력이 필요했다. 이전에 없던 글을 찾아내는 즐거움 뒤에는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부끄러움도 들여다보게 되었다.


문학을 읽은 다는 것은 양적인 만족감보다는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더 깊어지게 된 것도 같다. 그래서 같은 책을 다시 읽고 또 찾아서 읽게 되는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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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무쌍한 감정번역가/ 사연은 버리고 감정을 쓰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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