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데이비드 소로
작은 오두막을 짓고 살았던 그가 보고 싶었다.
미국의 살던 헨리는 전 세계 사람들이 애정하는 작가라는 것을 예상했을까? 날마다 산책을 나서고 거의 매일 일기를 쓰고, 마침내 완성한 <월든> 그리고 그의 일기는 많은 작가들과 애서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뚜벅뚜벅 홀로 걸어간 삶을 그는 글로 남겨두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길 위에 홀로 남겨질 때면 그를 떠올린다. 그가 호수가 딸린 숲으로 들어가 고독한 삶을 택한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는 산책을 꼬박꼬박 챙겼다. 마치 반복되는 현장의 일꾼처럼 말이다. 어디선가 자신의 자리에서 승부를 거는 사람들도 그러할 것이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세상엔 그와 닮은 사람들이 더 많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다만 글로 남길 기회가 있는지 아닌지만 다른 것은 아닐까. 어쩌면 종교인의 묵묵히 매일 반복하는 수행을 닮은 것은 아닌지도 말이다.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 열망을 품는 건
어떤 일일까? 나는 홀로 걷고 있다.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오른다. 감정이 생각을 방해한다.
그의 일기 속에서 우리는 다른 시대를 살고 있지만 결국 비슷한 상황을 건너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1854년 6월 16일의 일기
다시 하얀 수련의 향기를 맡는다.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계절이 왔다. 수련의 향기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우리의 희망은 무엇일까! 노예제도, 그리고 북부 정부가 비겁하고 원칙 없이 행동하는 것을 견딜 수 없지만, 세사에 대해 너무 빨리 절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얀 수련이 인간의 행위도 언젠가 향긋해지는 때가 올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연이어 나오는 뉴스를 보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파렴치한 행동들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무마되어 가는 것을 보아야 했다. 참 안타까운 죽음, 억울한 죽음이 있지만 미국의 노예제도처럼, 일반인들의 죽음 그리고 권리는 중요한 것이 아닌가 보다.
진흙 속에서 피어난 하얀 수련을 보며 남겨둔 일기가 2025년 지금에도 비슷한 정치인들의 민낯을 보고 있으니 말이다.
1854년 6월 16일의 일기
안개 덮인 호수 위로 물결이 일렁이며 반짝인다. 그러나 인간이 비열하다면 자연의 아름다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호수로 가서 자신의 평온함을 물에 비춰 본다. 평온하지 않을 때는 호수로 가지 않는다. 통치자와 통치당하는 자 사이에 원칙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게 누가 평온할 수 있을까?
정치가들의 비열함을 떠올리는 바람에 산책을 망친다.
나라를 생각하면 너무 괴롭다. <앤소니 번즈가 다시 노예로 송치된 뒤>
누군가는 스캔들을 일으키고, 누군가는 소비하듯 타인의 삶을 들여다본다. 얼마 전까지도 물론 지금도 언론은 정치인들의 일부 권력가들이 만들어 놓은 게임 판처럼 기사를 쏟아내니 점점 피하게 되었다.
그가 산책을 망친 것처럼 나도 그런 뉴스를 보며 감정이 상해버릴 까봐 말이다. 그는 삶에 배움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마을은 대학이 되고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여생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랐다. 멀리 파리나 옥스퍼드에서 만 대학이 있는 것이 아니길 말이다. 그는 굳이 멀리 여행을 다녀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가 사는 콩코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그는 지구 전체를 다 아는 듯 자연의 부름에 충직했으니 말이다. 그의 자연예찬은 어떤 글에서도 보지 못한 신실함이 느껴진다. 그래서 그의 글을 사랑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1856년 9월 2일의 일기
식물학자가 보스턴에서 서쪽으로 더 들어가 있는 내륙의 야생식물들에 대해 알려주었다. 자연과 인디언들이 선호하는 지역일 것이다. 동쪽 땅보다 서쪽 땅이 원래 더 야생에 가깝기 마련이다.
그와 산책하듯 길을 나서본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집을 나서 걷다 보니 야생이 머무는 곳이라면 서쪽으로 가야 한다. 그가 그 서쪽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궁금해졌다. 나는 겨울추위 뒤로 봄이 오는 것을 목격했다. 봄까치꽃의 초록 잎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어둑한 밤길을 나섰는데, 붉게 빛나는 보름달을 만났다. 그리고 소로가 걸었던 겨울을 떠올려 보았다.
어느 추운 날 산책을 나섰다가 돌아와 감기에 들었지만 폐렴으로 깊어져 죽음을 맞이야 해 했다. 요즘도 다를 바 없지만, 젊은 죽음은 어딘지 모르게 아쉽고 허망하다. 잘린 소나무의 나이테를 세다가 밖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보낸 탓일까? 아니면 이미 쇠한 몸이 버티지 못한 것일까... 봄이 서둘러왔다면 그는 이른 꽃을 찾아서 양지바른 곳으로 산책을 나섰을 것이다.
나는 상상한다.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은데 어쩌면 아무 말 없이 그가 걷는 길을 따라나설지 모르겠다. 뜨거운 태양이 금방 떠나지 않는 곳에는 여름을 맞는 동물들이 보일 것이고, 봄이 남기고 간 야생화의 늙은 모습도 볼 수 있을 것이다.
1851년 9월 2일의 일기
신체와 감각은 반드시 정신과 서로 통해야 한다. 머리가 유난히 건조하다고 느낄 때는 촉촉해지게 만들어야 한다. 글을 쓰는 작가는 자연을 대필하는 것이다. 그는 글을 쓰는 옥수수이자 풀이며 대기이기도 하다.
총체적 인간으로 지각하여야 하고, 지각한 것은 뭐든지 기록될 것이다. 기록은 시가 될 것이다.
매일 똑같은 일상이 지겨워질 때마다 나는 그의 일기장을 꺼내본다. 그리고 그를 따라 하고 싶어 단어들을 이어 붙이고 문장을 만들어 본다. 무엇이 될지 모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