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쌍 Dec 17. 2024

12월 달력에서 만난 보뱅과의 대화

크리스티앙 보뱅


꽃이 없는 쓸쓸함이 익숙해졌다.


맘껏 피어나던 나팔꽃은 검은 씨앗이 되고, 작은 흰꽃이 무수하게 터지던 풍성덩굴은 침묵하듯 멈추었다.

한낮의 태양이 내리쬐도 베란다는 서늘하다. 매일 들여다봐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 화분 틈에 붉게 빛나는 방울토마토 몇 개가 나를 안심시켰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초록 기운을 조금이라도 보고 싶어 야생의 들판처럼 그냥 내버려 두었다. 다시는 생생하지지 않을 것 같은데도 조금씩 목을 축이는 정도로 흙을 적혀주고 있었다.


몇 해전 레몬차를 만들다 빼놓은 씨앗들을 잘 말렸다가 화분에 심었다. 열개도 넘게 넣었지만 딱 두 개가 싹으로 돋아났다. 늦봄부터 부산스럽게 가지가 쏟구치더니 이파리 사이로 가시를 뽑아내며 레몬 나무가 되려고 버둥거리는 듯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꽃은 피우기커녕 아직도 싹만 내놓고 초라한 잎 몇 장을 펼쳐 심드렁해하는 레몬나무 같다. 글을 발행할 때가 되었는데 어떤 작가를 만나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도서관을 향하며 누구든 내게 말을 걸어줄 거라는 기대를 했다.  




서가에서 파란색 책 하나가가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다시 보뱅의 책 앞에서 마음이 뜨거워졌다.


크리스티앙 보뱅은 아쉽게도 2022년 별세했다. 프랑스에 태어난 그는 작가의 유명세는 뒤로하고, 고향 근처에 숲 한가운데 있는 집에서 글을 쓰는 일에만 일상을 보냈다고 해서 더 관심이 갔다. 각종 문학상을 휩쓸고, 문단에서도 그리고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작가였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는 세상에 없는 후였다.

프랑스 일간지 르탕은 고인을 가리켜 "어떤 이들에게는 위대한 시인이었고, 다른 이들에겐 낯선 작가였다"라며 "고인은 자신의 명성 따위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고, 숲 안 가운데에 있는 집에서 오로지 글쓰기에만 전념했다."라고 평했다.


 그를 알게 된 것은 어느 해 겨울이었다. 이미 세상에 없는 작가가 남긴 책을 펼쳐 들었을 땐 그가 아닌 그녀라고 믿었다. 책 속의 화자가 대부분 여자라서 그랬는지, 에밀리 디킨스를 위한 <흰옷을 입은 여인>을 썼다는 것만으로 판단해 버린 나는 형편없는 독자였다.


 스로 자책했다. 나에게 있는 편협한 생각들이 부끄러웠다. 아름다운 글이었고 아주 사적인 글들은 작가의 것인데 그것을 내 마음대로 단정했다는 것에 말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읽은 일도 노력이 필요했다. 이전에 없던 글을 찾아내는 즐거움 뒤에는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부끄러움도 들여다보게 되었다.


문학을 읽은 다는 것은 양적인 만족감보다는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더 깊어지게 된 것도 같다. 그래서 같은 책을 다시 읽고 또 찾아서 읽게 되는지도 말이다.



"죽음의 세탁물에서 꺼내 영원에 말린 하얀 드레스"


그가 하얀 드레스를 좋아하는 건 특정 화자일 수도 있지만,  하얀 드레스는 하얀 여백, 빈 노트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눈부신 하얀 종이에 수백여 통의 편지처럼 글을 쏟아냈고, 적어 내려 간 말들은 어린아이의 손에서 돌가는 작은 팔랑개비처럼 심장이 쿵쾅거리며 태양의 손길이 뺨에 느껴진다고 했다.

마치 사랑하는 여인을 그리워하듯 글을 쓰다가 느끼는 감정들은 아닌지 상상해 보았다.

그는 꽃에 대해서 쓰는 것을 좋아했다. 모든 작품 속에는 꽃이름이 나온다.   


그의 책에서 꽃 중독자라는 단어를 찾았을 때 너무 행복했다. 내가 쓰고 싶은 말들을 그도 알고 있었을까.

예전 같으면 꽃 도감을 들추며 지난여름을 추억하겠지만 글에서 풍기는 꽃향기가 그리웠다. 그래서

보뱅의 써놓은 꽃을 읽고 싶어 책을 찾았다.



나는 영원의 하늘에 시선을 빼앗긴 채 푸르른 공기를 삼킨다. 그리고 글을 쓴다. 이것이 대답 없는 것에 대한 나의 답장이며 시간의 잎사귀 사이에서 퍼덕이는 날갯짓이다. 그대가 더 이상 여기에 없어 그대 헤게 미모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못해도 미모사는 내게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또렷이 들려준다.


그의 나이가 아버지와 같다는 우연, 시를 쓰고 싶던 아버지가 많이 그리웠다. 

국내에 출간된 그의 책을 모조리 읽었다. 미국에서 살다 간  작가 에밀리 디킨스에 대한 글 <흰옷을 입은 여인>을 남겼고, 꼭 닮은 꼴인 것처럼 그도 조용하고 은둔적인 삶을 산  작가였다.


공공 도서관의 사서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글을 계속 써나갔다는 짧은 문장은 내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글을 온전히 쓰는 전업작가는 정말 쉽게 볼 수가 없구나. 또한 누구든 생계를 피해 갈 수 없다는 것도 말이다. 어쩌면 생계와 글쓰기를 병행해야 했기에 고독을 선택했을지 모른다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 솔직해서인지 그의 문장은 어디서도 찾아보지 못한 묘사가 있다.


 죽음은 슬프지만 그가 쓴 글에선 뭔가 다른 공간을 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곧 달력을 바꿔야 한다. 너는 1995년의 날짜 칸 안에 갇힐 테지만, 괜찮다. 나는 시간 속에 산 적이 한 번도 없었으므로 시간 속에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텅 빈 곳에서, 사막 안에서 살아간다. 시간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다.
네가 죽은 후 찾아온 가을과 겨울에 나는 너를 위해 이 작은 글의 정원을 정성스레 가꾸었다. 이 책의 영토를 마음껏 밟으며, 누구의 것도 아닌 빛, 네가 온전히 섬겼던 빛을 활짝 누리도록 그들을 초대한다.


 사랑한 여인이 떠난 자리는 얼마나 큰 구멍을 낸 것일까. "사랑한다. 그것 외에 무슨 말을 쓸 수 있을까. 써야 할 문장은 이뿐인데. 이 문장을 쓰도록 알려준 사람은 너였다."라고 그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의 글은 에세이 형식으로 글을 썼는데 마치 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연인을 죽음으로 떠나보낸 작가의 이야기는  끝까지 읽으면서도 뻔한 슬픔이 없었다. 신기한 음악을 듣는 것처럼 나는 그의 연인 지슬렌의 묘비 옆을 서성거렸다. <그리운 정원에서> 가장 먼저 피는 꽃이 스노 드롭(설강화)이 아닐까 싶었는데,  활짝 핀 이른 봄 묘지 주변에 잔뜩 피어난 꽃을 상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는 죽음으로 곁을 떠난 연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 무덤에서 돌아오는 길에 불현듯 깨달음에 이른다. 광활하게 펼쳐진 풍경 속에, 땅과 드넓은 하늘의 한결같은 아름다움 속에, 지평선 어디에나 네가 있다는 것을, 나는 그곳에서 너를 본다. 네 무덤에서 등을 돌리고 나서야 비로소 너를 본다."


그렇다면 나를 사랑해 주었던 아버지도 죽어서도 내 곁에 계시겠지. 봄날 꽃이 핀 나무를 볼 때마다 아버지가 부르는 듯 더 주의 깊게 보게 된다. 그러니까 "오늘도 잘 지내자. "라고 나를 다독인다.





 국내에 출간된 수필집을 차례차례 읽기 시작했는데, 자꾸만 감정이 울컥해져서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렀다가 툭하고 놓아버리는 듯한 그의 문장들이 날 자극했는지도 모르겠다. 길고 부연 설명이 된 글 말고 그냥 내뱉고 싶어졌다.


그가 쓴 단문들은 모두 시의 구절이다. 그가 쓴 시는 읽어 보지 않았는데, 그의 수필집을 읽으면서 시인이 되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침 해가 뜨자 또다시 그루터기를 찾아다녔다. 아버지처럼 젊은 나이에 떠난 나무들은 더 이상 새싹이 나지 않는다. 대신 그루터기 주변은 작은 야생초들의 천국이다. 새로 생긴 그루터기는 묘비명도 없고 풀 한 포기도 없지만, 곧 제비꽃이 지켜 줄 것이다.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겨울이 더 깊숙한 추위로 들어간다.

아버지는 크리스마스날 태어나셨다. 천주교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도 있지만 사실인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분명한 것은 내가 맞는 크리스마스날의 수 보다 아버지 나이가 더 젊다는 것이다.


오래전 달력에 갇힌 채 아버지의 기일은 변하지 않는다.

곧 달력을 바꿔야 한다. 남은 날 동안 그가 남긴 글 속에서 시간을 보낼 참이다. 그가 건넨 말에 시끄러운 대답 대신 나는 글을 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