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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쌍 Dec 10. 2024

꽃밭에서 편지를 쓰던 고흐와의 대화

빈센트 반 고흐

오랜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그가 남긴 꽃그림이 보고 싶어졌다.

가 그린 화병의 꽃그림을 갖고 싶던 시절이 있었다. 책상이 놓인 자리에 한 풍경처럼 그림을 걸어 두고 싶어 엽서를 구해서 벽에 붙여두었었다. 그가 그린 꽃은 가장 화려함으로 가는 직전의 환희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비록 잘린 절화지만 탐스럽고 건강하고 무게가 생명의 느껴지는 듯했다.


그가 유난히 좋은 건 왜였을 까?


 책을 많이 읽는 화가여서 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책이 될 만큼 편지글을 남겨서인지도 말이다. 그가 남긴 편지가 2,000통이 넘는다고 하니 그가 남긴 글은 책이 여러 권 되고도 남는다. 그래서 그가 남긴 건 그림 만은 아니었다. 소설가는 아니었지만 글을 쓰기도 했으니 이미 작가가 아닌가. 그는 독서광으로 모파상, 알퐁스도데, 피에르 로티, 발자크 등 당대 프랑스작가들을 특히 좋아했다. 책이 그의 정물화에 등장하는 이유도 그럴 것이다. 그동안 고흐에 대해서 꽤 많이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얼마 전까지 말이다.


발에 붉은 수염 그는 나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 사람이다. 하지만 그에게 나와 비슷한 구석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자신의 깊은 상처를 찾아내려고 안간힘을 쓴 듯 반 고흐는 정말 속에서도 치료가 되기를  바랐다.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또 나아지는 듯하기도 했다. 고흐 그의 생애가 짧고 안타까웠지만, 그는 아름다운 작품을 우리 곁에 두고 갔으니, 그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고흐는 예술적인 감각이 남달라 삶이 굴곡지다고 짐작했었다. 그런데 사실은 태어날 때부터 그는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는 흔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일찍 죽은 형 대신 같은 이름을 써야 했다. 심지어 목사인 아버지가 계신 교회 근처에 세워진 자신의 이름과 똑같은 형의 묘비를 봐야 했다. 어머니는 빈센트의 동생인 테오를 편애했는데, 그가 평범한 결혼을 하지 못했던 이유가 그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작가도 그가 행복한 결혼을 할 수 있었다면, 더 오래 그림을 그렸을 거라고 했다. 나도 그의 생각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형이 건강하게 태어났다면 그의 이름이 테오였을 것이고, 테오는 또 다른 이름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우리가 부르는 빈센트 반 고흐가 아니라 테오 반 고흐가 걸작을 그리는 화가가 되었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운명은 참 야속하기도 했다. 그는 어떻게든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고 싶었지만 가정을 이룰 기회를 여러 번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가난해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짐이 될 수 없어서 그는 사랑을 떠나야 했다. 그는 가진 것도 없지만 큰 부자가 되지 못했다. 적어도 그의 그림이 빛을 보았다면 그는 더 오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었을 텐데 말이다. 그의 작품의 가치는 어마어마 하지만 그는 살아생전 알지 못했다.


나에게도 테오 같은 동생이 있었다면,
내가 테오라면 빈센트 같은 형이 있었다면
역할 놀이를 하듯 내 처지를 한탄했다.



 부모의 사랑이 부재한 아이가 자립한 과정에서 겪은 고통을 그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의 동생에게 남긴 편지글의 일부를 보면 알 수 있다. 비관적이고 실랄한, 마치 카프카의 소설을 보는 것 같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에 대해 본능적으로(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나는 느끼고 있어. 나를 집에 들이는 것을 덩치 크고 털 많은 개를 집에 들이는 것처럼 꺼리시지. 젖은 발로 방에 들나들 게 분명한 그 개는 너무 더러워 모두에게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짖는 소리도 시끄럽지. 나는 자신이 일종의 개라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고, 그들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1883년 12월 15일경 테오에게 쓴 편지


 우리가 한 일은 남을 거고 그렇게 한 사람들은 쉽게 후회하지도 않을 거야. 적극적인 사람이 더 훌륭한 사람이지. 나는 게으르게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실패하는 쪽이 좋아
-1885년 7월 테오에게 쓴 편지




인생의 한 번은 파리로 가야 하는 걸까?


파리로 간 고흐는 화려한 빛과 색채를 그렸다. 꽃송이가 꽂힌 화병 1887년 그림은 고흐의 삶도 밝은 곳으로 데려간 듯싶었다. 그는 자신의 길을 가고 싶었다. '화가'의 길 말고는 없었던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림이 꿈이었던 그가 우리를 깊은 감동으로 몰고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동생 테오와 빈센트의 관계를 '이중구속'이라는 심리학적인 용어로 설명하기도 했지만, 나는 형제가 모두 어린 시절부터 비롯된 가족의 불행처럼 보였다. 동생의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던 형, 그림 그리는 형의 모든 걸 받아주는 것이 힘들지만 받아 줄 수밖에 없는 동생은 서로 쌍둥이 같았다.


 테오가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자 빈센트와 똑같은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뭉클해졌다. 테오와 빈센트가 서로 주고받은 것이 있었다.


빈센트는 조카의 침실에 걸어 두라며 파란 바탕에 하얀 꽃이 핀 아몬드 나무 그림을 보냈고, 테오와 요한나 부부는 아들의 이름을 빈센트라고 지었다. 죽은 형의 이름을 쓰던 빈센트는 또 다른 이름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두 형제가 죽은 뒤 조카 빈센트는 어머니와 함께 지금의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을 만들게  했다. 혈육으로 엮인 관계는 사랑으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놓을 수 없는 끈처럼  어쩌지 못하는 관계이기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지막엔 홀로 가야 하는 인생이  아닌가.  그가 영혼을 걸어 그림을 그렸다는 걸 우리는 안다. 그래서 그를 미워할 수도 없다.  



 나만 잘하면 모든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고 믿었다. 불편한 상황이 벌어지면 습관처럼 "내가 뭘 잘못했구나. 더 열심히 해야겠네."라고 먼저 떠올랐다.


 킁킁 거리며 사건을 쫓아다니는 수사관처럼 앞뒤 상황을 떠올리는 오지랖도 한몫을 했다. 한번 본  잘 잊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잘 못 보는 사소함도 내 눈에 잘 보였다. 시력이 문제가 아니라 타고난 호기심이 기이하게 발달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이기도 했고, 불편한 상황이 예상되는 것을 막아는 일이 익숙해있었다.


 어느 날 몸에서 신호가 왔다. 의사가 피검사 결과를 보더니 바로 회사를 쉬어야 한다고 했다. 최소 3개월 이상의 휴직이 필요하다며 진단서를 발급해 주었다.

 왜 나에게 그런 일이 생겼는지 원망하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누구도 날 병에서 구해주지는 못했다.


 입원치료는 하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환자복을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워 지내는 날은 계속되었다. 내 몸은 나아지지 않았고, 가족들 내 환자복이 보못했다. 직장에서 나를 찾는 전화벨은 줄어들었지만, 가족들이 날 찾는 일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약을 먹고 6개월이 지났지만 나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지 못했다. 어쩌지 못하는 몸을 지탱할 힘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연이 내어준 밭을 매일 찾아가는 일이  내겐 유일한 진료이며 마음의 치료 방법이었다.

 


반고흐의 아이리스(붓꽃)

 고흐가 그린 아이리스를  좋아한다. 정물화에 그려진 화병도 근사하지만, 땅속에 뿌리를 박고 꽃이 만발한 붓꽃이 인상적이었다. 생기를 잃은 몸 때문일까? 아픈 고흐가 그린 꽃그림은 강한 생명력을 느끼게 해 주었다.


고흐는 깊어진 우울증과 잦은 발작증세를 치료하고자 정신요양원에 스스로 입원했다. 치료를 위한 선택이었지만, 외부와 단절한 것은 고립을 통해서 창작에 몰두할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고흐가 생 리메의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당시 붓꽃에 매혹되어 그림을 많이 그렸다고 한다. 그는 붓꽃에게 깊은 영감을 얻었고, 꽃말이 '기쁜 소식, 행운'인 꽃을 그리면서 자신이 나아질 것을 확신했다고 한다. 긍정적인 메시지를 일깨우며 그림을 그린 것은 그만의 치유이었다. 마음의 병도 스스로 이겨낼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붓꽃은 온 힘을 다해 응원해 준 샘이었다. 고흐도 어쩌지 못했던 고통을 잊게 한 붓꽃은 나에게도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림을 들여다보면 아픈 그가 그림을 그리는 집중력은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영역인 듯싶다. 고흐의 색인 노란색과 대비되는 붓꽃 꽃잎이 우울했던 어둠에 환한 빛으로 쏟아졌는지도 말이다. 그 후로도 그는 고통을 완전히 떨치진 못했지만 죽음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양의 작품을 남겼다. 보이지 않는 자연의 힘을 그가 선택한 강한 색채 선명하고 탁월하게 전달해 주는 듯했다.

반 고흐의 아이리스( 붓꽃)


 지금도 그에 대해선 전히 연구되고 있으며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무슨 일로 고통받았는지 남아있는 기록들이 추정하게 하지만 그를 직접 만나 확인할 길은 없. 가 남긴 편지 글과 그림은 힌트를 주긴 하지만 말이다.


 붓꽃은 보라색으로 칠해졌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파란색으로 변했다고 하는데, 고흐의 노란색과 대비되는 그 차갑게 변한 파란색이 좋다. 명작은 좀 달라졌다고 해도 그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가의 표현은 전혀 퇴색되지 않아 보인. 그는 모르겠지만, 봄마다 나는 붓꽃을 그림을 그리는 고흐를 만는 기분을 즐기며 지낸다.



 가느다란 잎사귀 사이로 꽃대 하나가 솟아나면 날마다 찾아갔다. 겨울이 덮어버린 얼음 뒤에 숨어 있던 야생초가 땅 위로 초록 카펫을 겹겹이 깔고 나서야 드레스 차림의 사파이어색 꽃잎이 찾아왔다. 바로 붓꽃(Irises)이었다. 지난봄에 붓꽃을 보았지만 꽃잎들은 이미 시들어 버렸으니 다음 해엔 꼭 피기 전부터 보초를 서며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유난히 파란색꽃을 편애하는 나는 자줏빛과 보랏빛을 섞은 청보라색꽃잎 시들어가며 짙고 파랗게 변하는 붓꽃이 좋았다.


 고흐가 그린 붓꽃처럼 촘촘히 붙어 흐드러진 모습을 상상했지만 작년보다 더 줄어든 포기수가 아쉬웠다. 한송이가 피어도 향기롭기만 한 꽃은, 고흐가 그린 붓꽃 그림만큼이나 오래도록 감상하고 싶었다.

꽃이 핀 봄 한없이 나를 기다리게 만들었지만 관람시간만큼은 나만의 것이었다.

 꽃의 한철은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불평도 없었고 대신해줘야 할 일도 없었다. 오직 곁에 있으면 되었다.  마지막 남은 붓꽃 시들어 사라질 때까지 중랑천에 나갔다. 붓꽃이 핀 자연의 진료소를 찾아 용기를 모으고 또 모았다.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겨울엔 고흐의 붓꽃 그림을 보면 되고, 다음 봄이 되면 꽃은 또 필테니까 말이다.

  

중랑천 수변공원의 붓꽃(Irises)

 

 불행은 사랑받지 못한 유년 시절을 겪었거나, 평생 고치기 힘든 병에 걸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취약성 때문에 나만 할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을 외면하는 것은 더 큰 불행이라고 느껴졌다. 그것을 넘어서려고 노력했던 화가가 바로 그였다고 생각한다. 그가 영혼을 걸면서 까지 자신의 삶에 뛰어들었다는  증거가 바로 그림으로 남아 있다. 나도 글이 되길. 글로 피어나길. 확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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