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에 가면 오르한 파묵의 박물관을 둘러보고 곧장 오리엔탈 특급열차가 출발했던 기차역으로 갈 것이다.터키어를 할 줄 몰라도 머릿속엔 근사한 탐정 포와로 이야기가 있으니 장소에서 남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차를 타고 영국 런던으로 가면 포와로가 살던 아파트를 찾아가면 된다. 벨기에 출신인 포와로는 독일어와 프랑스어가 유창하지만, 나는 겨우 영어 몇 마디로 인사말을 건넬 수 있을 것이다. 이모든 것은 내 상상 속에 벌어진 것들이다.영화로 유명해진 노팅힐 거리나 템즈강변과 시계탑,런던에 갈 곳은 자꾸만 늘어간다.
퀸 메리 가든에 가서 장미들을 실컷보고 유명한 정원들과 정원박물관까지 돌아보려면 꽃이 많은 계절에 가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남편과 아이들이 내 취향을 모두 따라와 줄까 모르겠다. 엄마가 되고 나선 혼자 여행은 꿈도 안 꾸니 대신 가족들이 감수해야겠지...가족이란 단어가 떠오르자정신이번쩍 들었다. 나는 평소처럼 집 식탁의자에 앉아 있었다.방금 전에 달력을 보며, 어디론가 자유롭게 여행하고 싶다는 기분을 따라간 듯했다.
아차!지각하게생겼다. 하지만 아숴웠다.
조금 더 있었다면 생화인 장미 향기를 충분히 상상했을 텐데 말이다.허둥지둥 마음은 급해도 달리는 전철을 타고 다시 기차여행을 시작한다.
출근길 일터로 오가는 시간만 유일한 고독의 시간이다. 흔들리는 전철 안에 선채로 런던을 매일 오가고,
오리엔탈 특급 열차 안에벌어진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탐닉했다. 그리고 책을 좋아하는 주인공이 하는 말에 밑줄을 그었다.
주인공 포와로는 책을 낸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고 자신의 책을 아주 좋아한다. 늘 책을 읽고, 은유가 섞인 명언을 쏟아낸다.
아 내게 발자크 같은 글재주가 있다면 이 장면을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을 텐데.
소설 속 포와로처럼 그 여행지에 풍경을 글로 옮겨볼 꿈을 꾸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혼자 소곤 거렸다.
아. 내게 아가사 크리스티의 글재주가 있다면 숨겨둔 상처를 이야기로 써놓을 텐데.
<오리엔탈 특급 살인> 똑같은 장면에서 서글퍼졌다.
작고 귀여운 소녀의 죽음은관련된 사람들의 삶을 한꺼번에 지옥으로 몰고 간다. 소녀를 지키지 못했다는죄책감에 지쳐버린 피해자들이 법망을 피해 도망간 죄인을 찾는다.그리고가해자는 치유가 필요한 상처받은 영혼이었다는 것에먹먹하고 머리가 아파졌다. 사악한 한 사람이 많든 불행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뒤 흔드는지 또다시 느껴야 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두 삶을 살아갈 사람들을 뒤로하고, 포와로는 피해자의 치유를 선택하는 것으로 포와로 답지 않게 사건을 종결한다. 평소 감정에 치우 지지 않는 그가 죄인을 법의 심판에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냉철하고 완벽한 수사에 대한 자신의 흠결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을까? 어떤 자도 살인에 대해서 관대할 수 없다고 큰소리를 치던 그였다. 그 앞에선 무서워서 거짓말도 못할 것 같지만 왠지 그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오리엔트 특급열차에 탄 당신도 그 사건의 피해자가 되었으니, 당신도 치유가 필요했을 거예요.'라고 말이다.
범인이 잡히고 마땅히 벌을 받았다면 사건 이후에 더 슬픈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사건은 그 자체로도 참혹하지만, 시계를 과거로 돌릴 수 없다면, 죄인이 벌을 받아도 슬픔은 사라지지는 않을듯하다.
"그 상처들을 각각 다른 사람들이 한 번씩 찌른 것입니다."
같은 상처로 되돌려주고 싶어서. 나도 똑같이 갚아주고 싶었다. 실제로는 그럴 수 없지만 미움과 증오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삶은 그렇게 섞인 일들 속에 선택한 것들의 연속이 아닌가. 상상을 동원해서 까지도 누군가를 미워했던 건 내 상처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아가사크리스티도 남편의 외도를 막지 못했다. 모친이 죽음도 받아들여야 했다. 그녀가 대단한 소설작품을 쓴 작가였지만 삶이란 더 복잡하고 풀 수 없는 사건들을해결하지는 못했다.
나도 인생의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느닷없이 들이대는 것들을 잘 넘기는 것뿐이었다.우연히 일어난 일에도 피해자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마음의 상처는 어떤 것도 만들지 못했다.버릴 이유들만 더 확실해졌다.
즐거운 상상이 필요한 순간, 머릿속은 다시 런던이다.
항상 걱정을 미리 데려오는데, 근사한 미래를 떠올리니 진짜 여행하는 설렘도 느껴졌다. 런던에 온 나는 포와로를 어디서 만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고있다. 포와로도 장미꽃은 좋아하니 장미정원에서 만나면 좋을 듯싶다. 기분 좋게 장미향을 맡고 있는 그에게 런던을 여행 중이라고 인사하면 뭐라고 할까?
"아! 런던 여행을 오셨다고요. 즐거운 여행 되세요. 마담!"신사인 그는 내인사를 친절히 받아주고는 재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수다가 좋은 나는 할 말이 많지만 말이다.
글쓰기에 빠진 나는 런던을 자주 간다. 머릿속은 늘 수많은 작가와 인물들이 있는 런던을 걸어 다니고 있다.
곧 기차를 탈 예정이다. 가족들이 수락만 해준다면 동해로 혹은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예약할 것이다. 포와로가 누워 잠들었던 침실칸은 아니지만 낄낄 소리며 찰스디킨스의 책을 읽는 포와로를 떠올리지도 않고 살인사건을 꾸며내는 아가사크리스티를 따라 이야기를 지어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꾹 참아볼 참이다.
복수를 하기 위해서 나를 괴롭히는 것보다는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 포와로가 내린 기차역 풍경 뒤로 그가 남긴 말을 내 것처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