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 떠날 것 같았지만 은행나무가 만들어 놓은 무대는 요즘 절찬리 상영 중이다. 노란색으로 변한 길 위에서 예쁜 소녀가 떠올랐다.
에메랄드 시로 가는 길에는 노란 벽돌이 깔려 있어요. 그러니까 길을 잃을 염려는 없을 거예요.
아무도 모르는 곳에 뚝하고 떨어진 도로시가 괜찮은지 걱정도 되었지만아주 끔찍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절대 무섭지 않았다. 바로 노란 벽돌길 때문이었다. 길가의 풍경은 양귀비꽃이 만발하고, 아름 다운 숲길을 따라 오즈의 마법사를 찾아간다. 그리고 우스꽝스럽지만 위험하지 않은 낯선 친구들도 만난다.
때로는 즐거운 곳을 지나고 때로는 어둡고 무서운 곳을 지나서 먼 길을 가는 여정은 그 끝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도로시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곳에서 남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문학작품은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라도 상상이 데려가는 끝에는 내 멋대로 곱씹어 보게 된다.
아이였던 내가책을 읽을 때만 해도 도로시는 왜 부모님이 아닌 아저씨와 아줌마 사이에서 살았을까? 궁금했다. <오즈의 마법사>를 몇 번이고 읽었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고아가 주인공인 작품이 한두 개도 아니고 말이다.
어른이 되어도 분명한 것은 없었다.
오히려 몰랐으면 하는 상처들이 섬뜩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우연히 알게 된 나르시시스트, 플라잉 몽키의 존재가 오즈의 마법사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에 놀랐다.
이야기 속에는 유일하게 못된 존재가 등장한다. 못된 마녀 그리고 플라잉몽키 들이다. 도로시를 도와주는 착한마녀도있었고 방해하는 못된마녀도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악역인 플라잉 몽키는 못된 마녀가 시키는 대로 하는 하인 같은 존재였다.
마녀가 시키는 대로 복종하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행동이 어떤지 판단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한 행동은 조종자가 시키는 그대로였다.
그러다 자신이 저지르는 일에 의문을 품고 마녀의 곁을 떠났지만했던 플라이몽키가 한 일은 사라지지는 않는다.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살았던 모습이 내게도 있었다. 그리고 잘못된 행위라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깨닫게 된다. 플라이몽키처럼 나도 뒤늦게 알았다.
나는스스로 주인이되지 못했구나.
플라잉몽키가 되었다가 희생양이 되었다가 어느 날 거울을 보다가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더는 그 역할을 해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스스로가 만든 감옥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알아채는 것이었다. 인식되면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미 지난 과거가 되었고, 알아채는 순간 주술은 사라져 버리니 말이다.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두려움은 완전히 떨쳐내진 못했지만 시간은 내편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참 아이러니 하게도 영화 <오즈의 마법사>이 도로시역을 맡은 주디 갈란드의 비극이 숨겨져 있다. 영화 촬영을 위해서 약물을 몰래 먹인 엄마와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나르시시스트고 누가 플라잉 몽키가 되었는지 어린 주디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도 행복하지 않았다. 예쁘고 노래를 잘 부르던 아역 배우는 재능이 많았고 팬들의 사랑받았지만, 정작 받아야 할 모정은 없었다고 한다.
훗날 그녀도 엄마가 되었지만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모처럼 휴일을 앞둔 늦은 퇴근길이었다. 주말도 없이 일을 하는 것이 고단했지만 늦가을 꽃처럼 핀 가로수들이 반갑게 맞아 주니 금방 근사한 기분이 들었다. 가로 등 아래 내리쬐는 빛은 바닥을 수북하게 덮은 은행잎을 더 돋보이게 했다. 듬성듬성 비추고 있는 가로등이 만든 공간은 무대처럼 눈에 띄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몇 번의 무대를 지나쳤을까?
내가 무대에 올라갈 기회가 있다면 어떨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을까? 작가들이 남겨둔 문학작품을 읽다 보면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어서 낑낑대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작가들이 남겨둔 힌트와 모범 답안을 보면서도 말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었으면 했지만, 내가 아닌 문장은 시작할 수 없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꼭 쓰고 싶은 이야기 있는지도 모르겠다.
도로시는 왜 고향으로 돌아갔을까?
그녀를 사랑해 주고 아껴주는 앤 아줌마가 기다리고 있을 거란 걸 알고 있어서가 아닐까. 컴컴한 저녁 환하게 뜬 보름달과 은행잎이 깔린 길 위를 걸으면서 나의 에메랄드시는 어디에 있는지 떠올려보았다.
매일 퇴근하고 가족이 있는 품으로 돌아간다. 아침에 아이가 " 엄마 조심히 다녀오세요!"라고 하는 말을 마법의 주문처럼 저장해 둔다. 도로시가 구두 뒤꿈치를 툭 툭 툭 부딪치는 것처럼 나도 따뜻한 집으로 돌아간다.
고향, 내가 태어난 곳은 제주 바닷가 마을이지만 고향을 거부했다. 왜 돌아가고 깊지 않을까? 나의 고향이 맞다면 도로시처럼 돌아가고 싶을 텐데 말이다. 도로시처럼 고향이 좋았으면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기분을 느껴보고 싶은데, 해피 엔딩으로 끝난 오즈의 마법사처럼 나도 그러고 싶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에메랄드 시처럼 찾아갈 수 있다면 나는 새로운 곳을 고향으로 정해 보고 싶다. 그래서나만의 고향을 상상해 보기로 했다.
깊은 산속 바다와는 거리가 멀고 먼 곳이면 어떨까?
겨울의 별미는 할머니가 말린 밤으로 지은 밤밥 그리고 자글자글 끓인 버섯국, 간식은 할아버지가 직접 만드신 감말랭이다. 상상 속이지만 바닷가 마을이 아니서 안심이다. 괴로운 기억도 없고 어떤 맛일지 상상해 보는 즐거움도 있으니 말이다.
길을 잃은 듯 막막할 때가 있다.
몸에 깊게 베인 슬픔들이 짠 바닷가 풍경과 함께 밀려오는 날이다. 그럴 때마다 무언가를 쓰고 싶어 진다.
이제 나는 새로운 고향을 찾아간다.
깊은 숲 속에 있는 나 혼자만의 고향집에 들어가서 소설을 쓴다. 내 소설의 주인공도 도로시처럼 작은 소녀다.
나의 소녀에게도 친절하고 다정한 아줌마와 무뚝뚝하지만 든든한 아저씨와 함께 살게 해주고 싶다. 아니면 오래오래 사는 할머니를 곁에 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착한 마녀가 용기를 주고, 못된 마녀를 멋지게 혼내주는 이야기도 근사할 것 같다. 문장들이 멈추지 않고 쓰일 때까지 나는 그곳을 찾아가려고 한다.
초록 기운이 가득한 숲 속 고향은 내가 쓴 이야기에서 더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다. 곱게 물든 은행나무들이 숲아래를 노랗게 만들었다. 노란 은행잎을 밟고 걷다 보니 금방 이야기가 써질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