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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쌍 Nov 05. 2024

키다리아저씨에게 편지를 쓰던 주디와 대화

키다리 아저씨

  너머 바람이 시키는 대로 낙엽이 흩날렸다. 파랗게 열린 하늘, 시선이 닿는 곳은 어디든  황금빛으로 반짝이니 집안에서 구경만 할 수 없었다. 낙엽이 비처럼 쏟아지는 풍경을 창문 너머 보다가 모처럼 휴일인데 그냥 보내기 아쉬웠다.

 

알록달록 꽃처럼 변해가는 나무들은 찾아보려고 나섰다. 가로수 은행나무는 서있는 순서대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나무아래 떨어진 잎이 따라오라는 데로 걷기 시작했다.

노란 은행이 만든 길 위의 가을을 아무렇지 않게 밟고 걷기가 미안했다. 은행잎이 낙엽으로 애쓰는  동안 무얼 했나 싶은 생각에 입이 무거워졌다.


 숲이 가까울수록 공기는 더 신선하고 계절이 주는 청량함이 머릿속까지 시원해졌다.  익숙한 자연이 감싸주는 다정함에 마음이 풀어졌다. 나무사이로 바람이 불자 정신이 차려졌다. 다시 찾은 숲엔 온사방이 가을색으로 변해 었다. 지난가을에도 보았던 반가운 시절이 나 또한 버터온 날들이었구나 싶었다. 그 틈에 한결같은 상록수가 드문 드문 서있는 잡목림이 우거진 숲은 조용하니 좋은 기분이 들게 했다.


 새벽 찬 공기 사납게 느껴져서 인지 초록잎 토끼풀 위에 겹겹이 놓여있는 플라타너스 잎이 이불처럼 온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나의 안부를 전해보고 싶어졌다. 문자나 잉크가 얼룩덜룩 묻은 종이에 썼다가 멈췄다가 이어지는 구구절절한 수다 섞인 편지를 보 기억이 뚝뚝 떨어지는 낙엽처럼 생각났다.


 작은 종이에 끄적인 문장을 친구와 주고받았지만 그렇게 중요한 내용도 아니었다.


" 학교 끝나고 뭐 해?"

" 같이 갈까?"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 쪽지는 하루종일 서너 번 교환되고 하굣길에 같은 버스를 타고 수다를 떨던 친구들이 생각났다. 방학이면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렸다.


 어쩌면 글을 쓰고 싶다는 기분이 든 건 편지 쓰기를 좋아했던 시절에서 출발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훨씬 전 편지 쓰기를 좋아했으니 말이다. 연애편지를 쓸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는 있었지만, 아쉽게도 휴대폰 문자가 익숙한 시대로 멀어졌다.


 편지, 받는 사람, 보내는 사람, 우체국 이런 단어들이 연상되는 계절이었던 시절 좋아했던 책이었다.



 주인공은 고아였다.

 평범한 일상에서 갑자기 찾아온 소식에 기쁨도 잠시, 자신을 대학에 보내주기로 한 한 후원자의 요구사항을 들어야 했다. 대학에 가게 되면 한 달에 한 번씩 존 스미스라는 분에게 편지를 써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분은 네가 창의력이 있다고 생각하시고 너를 장차 작가로 키우겠다고 하셨어."


누군가 재능을 알아봐 주었다는 기분은 무엇일까? 나는 그 대목에서 알 수 없는 상실감을 느꼈다. 자신이 가진 재능이 무엇인지 알아봐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말이다.


 수없이 물어봤다.


나는 잘하는 것이 무엇일까?

나에게도 재능 있을까?


답은 누구도 해주지 못했다. 나를 알아봐 줄 존재가 있다는 기분이 무엇인지 느껴보고 싶었다. 그리고 시시콜콜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가 필요했는지도 말이다.


고아로 자란 주인공이라면  모든 것이 결핍된 존재가 아닌가. 오랫동안 나도 그런 고아와 다를 것이 없다는 기분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이끌어 줄 스승 같은 부모의 존재를 그리워했다. 그래서일까.

작품을 남긴 작가들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고,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어떤 경지에 이르는 사람들의 지혜를 내 것으로 하고 싶은 욕구였지만, 먹어보지 않은 음식을 사진으로 맛을 알리가 없는데도 고집을 피우는 일이었다.


내 수다를 다 들어줄 상대에게 다 털어놓는다고 해도 삶은 스스로의 것이 아니던가. 그래도 그것이 책 한 권이 된다면 키다리아저씨의  작가 진웹스터처럼 써보고 싶었다. 다시 읽은 책은 다른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예전에 읽던 나는 이제  달라져있었다.

  

 책의 말미에 있던 이 문장을 다시 읽으면서 놀랐다.


어젯밤에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한 서점에 들어갔는데 점원이 <주디 애벗의 생애와 편지>라는 제목의 새로 나온 책 한 권을 제게 갖다 주는 거예요. 붉은색 표지에는 존 그리어 고아원 그림이 그려져 있고, 첫 장에는 저의 초상화와 함께 '당신의 주디 애벗'이란 글씨가 적혀 있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마지막 장에 있는 묘비문을 읽으려는 순간 그만 잠이 깨고 말았어요. 어찌나 속상하던지! 제가 누구와 결혼하고 언제 죽을지 알 뻔했는데 말이에요.


주디는 그리고 작가가 되기 위해 소설을 쓰고 있다는 걸 아저씨에게 밝힌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이 얼마나 진척이 있는지 편지에 이렇게 써놓는다.


"저는 제 자신의 자유의지와 일을 해내는 능력을 굳게 믿고 있어요. 그 믿음은 태산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지요. 저는 훌륭한 작가가 될 테니 두고 보세요! 새로 시작한 소설은 이미 4장까지 완성되었고 5장도 마무리만 하면 돼요."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진  당신은 자신을 정말 믿었나 봐요. 작품 속 주인공이 한 말은 그녀의 진심이었을 것 같아요."


소설이  알려지고 독자들이 생기기 전엔 책 속에 숨겨둔 작가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책이 사람들에게 읽히는 상상을 수없이 했을 테니 말이다.


  알려진바대로 라면 웹스터의 어머니가 대작가인 마크트웨인의 조카이기도 했고, 부친은 출판업자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가 첫아이를 낳다가 산후열로 사망했다는 일화는 참담했다.  그녀의 열정이 담긴 책을 남겨둔 것처럼 그녀를 닮은 딸이 세상에 태어났다.  가진 듯 부러운 존재  같았지만 작가들도 삶을 살다가는 인간이었다. 꼭 작가 되지 않아도 글을 쓰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중얼거렸다.



  나의 하루도 책 속에 문장으로 피어나길
나의 문장도 편지처럼 누군가에게 닿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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