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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쌍 Oct 29. 2024

글쓰기, 바다에서 만난 헤밍웨이와의 대화

어린시절


겨울바다, 
들리는 건 파도가 내는 소리, 지나는 바람 소리뿐이고 짠 냄새를 머금은 공기를 휘감고 있는 해변가에 서있는  상상 해 보았다. 아무렇게나 괴롭히는 걱정들도 나서지 못할 정도로 정신을 쏙 빼놓는 풍경을 만나고 싶었다.


귤밭에서 봄 여름 가을을 나고 조천 바닷가 집에서 겨울을 보냈다. 해녀를 하던 할머니는 늘 내게 먼 나라 미국에 가서 살아보라고 하셨다. 나에게 출생의 비밀이라도 있는 것인지, 아무도 모르는 먼 나라로 가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 줄 알았다. 그리고 할머니와 덮칠 듯 내리 치는 파도를 보는 시간이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겨울 제주바다는 그리움이 무엇인지 적확하게 일깨워주는 대상이었다. 쉴 새 없이 파도는 내게로 밀려왔지만, 내가 기다리는 사람들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할머니 마당에 채송화가 꽃이 피었고, 다시 귤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육지로 나온 나는  바다가 너무 멀어졌다.

  


 
시험 점수가 엉망이면 어쩌지?
월급이 들어오지 않으면 어쩌지?
결혼을 못 하면 어쩌지?
아픈 몸이 나아지지 않으면 어쩌지?
애를 잘 못 키우면 어쩌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죽어버리면 어쩌지?


 여러 단계의 걱정들을 거쳐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런데 요즘은 '쓰지 못하면 어쩌지?'가 고민이다. 하루쯤 쓰지 말까 싶기도 하고, 아무리 써도 내가 쓰고 싶은 글을 못 쓸 때도 그렇다. 요즘은 두 가지의 의미가 다 담긴 걱정을 한다. 그렇게 들어오고 싶은 세계였지만 매일 써야 한다는 자신과의 약속은 오히려 나를 의기소침하게 한다.

 자신감이 떨어질 땐 책 속에 살고 있는 작가들을 만나면 해결되기도 한다. 바로 책 읽기다. 방금 전까지 한숨을 쉬고 있었는데, 텍스트를 읽기 시작하자 증세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보통은 잘 듣는 진통제 목록처럼 편애하는 책이 정해져 있지만, 요즘은 모든 작가의 책이 효과가 있다. 글 쓰는 시간이 늘어나자 작가들에게 더욱더 깊은 존경심이 생겨났다.


나만의 글쓰기는 점수를 받지 않아서 좋았다.

하얀 여백에 무늬처럼 글이 쓰이면 자화상처럼 내 것이 되었다. 온전히 내 얼굴이 그려진 적당하게 주름이 있고, 꾹 다문 입술이 하고 싶은 말을 가둔 채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하는 내면이 차란차란 잔잔하게 물결치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누구도 모르게 나만 아는 사연을 겹겹이 물속에 녹여버리면 그만이었다. 자화상을 몇 번이나 그릴 수가 있었다. 숨겨둔 것들은 나만의 단어가 되었으니 부끄럽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망망대해 끝없는 바다, 작가 헤밍웨이가 떠올랐다. 전쟁에서 도시에서 그리고 쏟아지는 관심에서 멀어진 그는 바다를 수없이 바라보고, 매일 몸을 담그며 은둔 속에서 글을 썼다.  


작가는 우물과 비슷해요.
우물이 마르도록 물을 다 퍼내고
다시 차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규칙적인 양을 퍼내는 게 낫습니다.



작가의 대명사인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한 말이다. 그의 운둔 시절의 마지막 인터뷰라는 <헤밍웨이의 말>을 읽었다. 책을 열자마자 펜을 들고 있는 안경 쓴 헤밍웨이의 사진을 보니 압도하는 작가의 아우라 눈이 떼지지 않았다.
 
 그냥 써도 모두 작품이 될 듯하지만 그도 글을 쓰는 일이 쉽지 않다고 한다. 그가 오랫동안 공들여 쓴 <노인과 바다>가 완성되기까지 10년이나 걸렸고, 출간된 작품이 돌풍을 일으키며 얼마 뒤, 퓰리처상(1953년) 노벨문학상을 (1954년) 받게 되었다는 것도 잠시, 지독한 병이 그를 괴롭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몇 년 뒤 자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전 그가 1954년 10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서면으로 대신한 글을 읽게 되었다.


작가로서 글을 쓴다는 것은, 최상의 상태에서조차 고독한 삶입니다. 단체나 조직은 잠시나마 작가들의 고독을 덜어 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작가의 글을 향상해 줄지는 의문입니다. 작가는 고독에서 벗어나면서 명성이 높아지기도 하지만, 그러다 보면 흔히 작품의 질은 퇴보하기 마련입니다.

 작가는 혼자서 글을 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며, 훌륭한 작가라면 영원한 고독 또는 영원한 고독이 주는 결핍과 매일매일 부딪혀야 합니다.
진정한 작가에게 있어 매 작품은 성취감을 뛰어넘어 어떤 것을 얻기 위해 다시 시도하는 새로운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것이 없거나, 혹은 다른 이들이 시도했으나 실패한 무언가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론 행운이 따르게 되면 성공할 것입니다.


차라리 그가 지독한 독감이나, 낙상사고로 다리가 다쳤다면 어땠을까? 마음의 병은 참으로 가혹하고 종잡을 수 없다. 버지니아 울프도 그랬지만, 지금 시대처럼 치료법이 안전하지도 않았던 때였다. 세계대전을 겪은 세대가 어떤 삶이었을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상상할 수 없는 공포와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겼다는 것은 분명했다. 헤밍웨이도 그 세대를 산 작가였다. 특히 그는 내면의 상처만큼이나 몸을 다치는 큰 사건들도 겪어야 했다. 비행기 사고를 연달아 겪고 나서 더 건강상태가 나빠졌다.


어디서부터 생긴 트라우마가 그를 계속 괴롭히고, 무엇이 몸을 무너지게 했는지 궁금했다. 아버지의 자살, 어머니의 양육방식, 그는 경제적으로는 부유했을지 모르지만 결핍이 많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의 글에선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명확하고 단단한 인간적인 면모가 더 드러나기 때문이다. 소설에선 적확하고 선명한 묘사와 대화체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의 모습 그대로 투영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작품 밖의 그의 글을 너무도 달라 보였다. 연약하지만 덩굴손을 휘감아 오르는 나팔꽃처럼 매일매일 새꽃을 피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작가는 스스로의 삶을 글로 남겨두기에 그의 인터뷰에서 힌트를 얻었다. 그는 매일 우물의 물을 규칙적으로 퍼내듯 글을 쓰고 있었다. 슬프게도 그를 쓰지 못하게 했던 건 아픈 몸이었다.


소설이나 단편을 쓸 때면 매일 아침, 가능한 해가 뜨자마자 글을 씁니다. 방해할 사람도 없고, 날은 서늘하거나 춥고, 와서 글을 쓰다 보면 몸이 더워지죠. 전날 써놓은 글을 읽어봅니다 늘 다음에 무슨 일인지 알고 있을 때 작업을 끝내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계속 써나가요. 아직도 신명이 남아 있고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는 지점까지 쓴 다음, 거기서 멈추고 다음날까지 꾹 참고 살다가 다시 시작합니다.....
다음 날까지 기다리는 것, 그게 힘든 일이죠.   


몸이 아프지 않았다면 그는 계속 글을 썼을 것이다. 헤밍웨이의 인터뷰에선 매일 쓰고 써야 하는 일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며 작업하는 일도 쉽지 않은데, 장애물처럼 몸과 마음이 흔드는 통증들을 넘어선다는 것이 그를 더 힘들게 했을 듯싶다. 막 예순을 넘긴 그가 더 여유롭고 건강한 인생 후반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면, <노인과 바다>처럼 또 다른 노인이 주인공이 된 작품을 읽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생을 마감해도 작가의 글은 멈추지 않는다. 미완성 원고나 출간되지 않는 원고가 발견되고, 쓰다만 문장과 기적인 메모들이 발굴되기도 한다. 작품이 영상화가 되기도 하고, 다른 작품에 영향을 주기도 하니 그가 남긴 영향력은 끝날 줄을 모르고 있다. 헤밍웨이 역시 생전에 출간한 작품 말고도 사후에 발표된 작품들도 있다. 헤밍웨이에 관한 이야기가 루머인지 사실인지 경계를 넘나드는 후일담을 보면 우울한 기분이 들지만 완벽하게 밝은 이야기만 늘어놓을 수 있는 인생을 살다 갈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되겠는가.

 그래서일까. 작품을 완성하는 일은 몰아치기가 아니라 매일 조금씩 물을 퍼내는 일처럼 해야 하는 것이라는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내일도 비슷한 오늘처럼 지내길 바라면서 말이다. 일단 발을 들여놓았으니 계속 멈추고 싶지 않다. 시작하긴 어렵지만 '쓰기의 시간'은 금방 끝이 나지 않는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글을 여러 번 고치는 것을 절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책상은 고요하지만 치열한 곳이었다. 글을 고통 없이 너무 쉽게 쓰려고 하지 않았는지, 노력 없이 요령만 부리려는 건 아닌지, 터벅터벅 시끄럽게 소리 내던 발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오늘도 난 말없이 잠잠하게 조용해지는 연습을 하고 있다. 다 읽은 책을 덮었더니 입은 무거워지고 글을 쓰는 손가락만 부지런해진다. 울이 오고 있다. 파도소리가 들리고 짠내가 풍기는 바다가 떠오른다.

행이 너무 많아 보이는 헤밍웨이가 생각나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과 바다>를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묻고 싶. 당신은 왜 어부가 되었는지 말이다.


"나는 바다가 배경인 그 작품이 읽기 싫었어요, 나에게 바다는 무섭기도 하고 꼭 나서야 하는 삶의 터전 같았거든요.  연상되는 모든 것들이 먹먹한 것들 뿐이었어요.

 할머니가 먹음직스럽게 삶은 문어를 잘라 주면서 먹으라고 했지만 나는 울컥했거든요. 아주 어려서부터 나는 타인의 상황을 마치 나처럼 느끼는 일에 능숙했던 것 같아요.  바닷물 속에서 숨을 참는 할머니가 떠올라 먹을 수가 없었거든요."


<노인과 바다>를 읽고 한참 뒤에 그가 노인이 아니라 어린 나이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노인은 아니었을까 하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살한 아버지가 까지 자신에 곁에서 살아남아 주었다면 하는 간절함은 아니었을지 말이다. 불굴의 의지로 살아 돌아간 노인 끝까지 살아서 온 삶을  예전엔 작가 자신을 투영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젊은 사진으로만 남은 아버지가 노인이 되어 곁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쓰고 싶지는 않았을지 상상해 보았다. 로 바다에서 죽음을 맞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이 내내 마음이 걸렸다.


내 곁에는 없지만 그리운 사람들은 소설에서도 우연히 지나친 타인의 뒷모습에서도 만난다. 바다가 그리운 것이 아니라 그 바다를 함께 보던 할머니가 그리웠던 모양이다. 금은 곁에 없는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것도 나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받아 드리기로 했다.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해도 무슨 문제가 될까.  


나 혼자 세상에 나온 것도 아니기에, 우리는 누구도 혼자 살아갈 수 없지 않은가. 나 역시 누군가의 보살핌으로 자라왔으니 말이다. 불행을 모으기보다는 희망을 찾기 위해서 다시 책을 펼쳐보았다. 그리고 나를 설득했다.


"글을 쓰는 일은 인생의 겨울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지만, 작가들은 스스로 온기를 만들어 따뜻한 사랑을 표현하고 태양처럼 빛을 나누어주는 주인공들을 창조하는 건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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