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쓰지 않고 다른 일에 더 열중했다. 내 앞을 누가 막지도 않았는데 늘 방해하는 누군가가 있다고 살았나 보다. 부정적인 감정에 매몰된 나는 스스로 끌고 다닌 슬픔이 있었다.
왜 나만 이럴까에 사로 잡혀서였다.
출근길 내리는 비에 붉은 단풍잎이 아무렇게나 붙어있는 트럭을 만났다. 떨어진 낙엽은 계절이 하는 일이고 비는 피할 수 없는 날씨였다. 내가 마주친 일들도 자연의 이치라면 어떨까? 트럭 주인은 뭐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 앞에서 나는 감탄하고 사진을 찍었다.
각자의 슬픔은 있지만 문학작품에서 사랑을 표현한다.
고된 삶을 결국 해피엔딩으로 만드는 재주는 작가들에만 있는 건 아닐 텐데 말이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내가 쓴 글을 꺼내 읽는다. 결국 첫 번째 독자도 나이고 나를 위한 글이기도 하니까. 좋아하는 작품과 작가들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었다. 독후감 쓰기를 좋아하던 어린 시절 즐거웠던 감정들이 되살아났다.
이미 세상에 없는 작가들만 골라서 편지처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가들과 상상 속 수다를 하다 보니 이미 난 불행에서 벗어나 있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던 5살 어린 나를 만났다. 컴컴한 밤 할머니와 한 이불속에 누워서 기다렸다, 나를 안아주고 미소를 짓는 따뜻한 모정이었다.
나를 낳은 부모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기분을 꾹꾹 참으며 동이 트길 기다렸다. 아침이 되면 집으로 갔지만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았다
끝도 없이 셀 수 없는 귤나무 숲을 구석구석 누비며 자랐다. 몽테뉴가 물려받은 건 성과 서재였다. 하지만 난 여자라는 이유로 내 몫은 없었다. 몽테뉴는 아버지의 지병도 물려받아야 했지만 그는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나쁜 업보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지만 어느 날 길을 잃어버린 듯 문제가 생겼다. 우울증과 함께 찾아온 갑상선 염증이었다.
항상 좋은 일은 혼자 있을 때 생겼다. 그래서 혼자 있을 때가 가장 안심되었다.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몰랐다. 나를 붙들고 있는 가족이란 존재가 너무도 버거웠다. 태어난 곳을 떠나 가장 멀리 도망치듯 나왔지만 가족들은 나를 계속 괴롭혔다. 괴로움을 떨치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온전히 내가 되는 것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왕자의 자리까지 버린 싯다르타를 읽으면서 혼자가 되는 일이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도망갈 곳이 없어서 날마다 지옥이었다.
바로 곁에 없어도 머릿속에서 유령이 계속 말을 걸었다. 누군가 나를 조종한다는 기분을 알아챘을 때 어디서부터 잘 못된 것인지 도저히 알아낼 수 없었다. 지옥이 있다면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모두 보내고 싶었다. 고향에서 추방된 단테처럼 나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단테는 정치적인 이유였지만, 나는 고향이 지옥이었다. 이유는 달랐지만 고향으로 갈 수 없는 그에게 연민의 감정이 들었다.
고향의 귤밭이 그립지만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만 존재한다. 귤을 보기만 해도 눈물이 쏟아져 먹을 수가 없었다. 싱아를 먹던 유년시절을 잊지 못하는 박완서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의 문장들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오래된 기억을 따라 선을 그어 그림을 그리듯 천천히 선명해지는 장면들이 생겼다.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무서운 눈초리들이 함께 떠올라 무섭기도 했지만, 야생의 자연에서 충분히 만족스러웠던 유년의 추억도 발견했다.
기억 속에 숨겨졌던 감정들을 문장으로 써 내려가다 보니 상처받은 내면 아이를 마주 해야 했다. 우울한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와 불면의 밤을 지새워야 했고, 카프카의 쓸쓸한 감정도 내 것처럼 다가왔다. 전혜린의 일기장에서 엄격한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어머니조차 냉정했던 슬픈 여자아이를 만났을 땐 거울을 보듯 소름이 돋았다.
할머니의 손이 그리워지면 타샤의 글과 사진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귤밭의 야생화들 사이에서 맘껏 놀았던 나와 말이 가장 잘 통할 것 같은 아저씨도 만났다. 바로 턱수염이 덥수룩하고 작은 체구의 헨리 데이비스 소로였다. 하늘의 구름을 올려다보다가도 곱게 핀 야생화를 찾아 고개를 숙인 채 하루 종일 귤밭을 쏘다니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소로가 그랬던 것처럼 꽃이 필 시기가 되면 같은 장소를 찾아 꽃이 피었는지 더듬어 보았다.
길가의 꽃을 보면 눈이 멈추고 몸이 그 앞으로 가는 나이가 되었다. 남편과 아이들의 일과 속엔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고, 온전히 나만 떨어져 나오기 어렵다.
스무 살의 클라리사를 떠올리며 고향에서 독립해서 나오면 달콤한 장소가 있을 거라 간절한 기대를 하던 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슬픈 어린 시절이 작가로 글을 쓰게 했지만,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에 괴로웠다. 버지니아 울프는 명작품을 남긴 대단한 작가였지만, 내겐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치유의 도구였다.
제인이 에어 삼촌에게서 상속을 받은 장면에서 나를 낳아준 생모가 언젠가 나를 찾아올지 모른다는 상상도 하게 했다. 어린 시절 친부모가 어딘가에 있을 거란 생각은 내 머리가 이상해서 든 생각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더는 서 있을 수 없었다. 넘어진 내 손을 잡아 준 것은 남편 그리고 아이들이었다. 상처를 가진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준 가족들 덕분에 나는 트라우마를 곁에 두고도 잘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불편한 감정들을 숨기는 것이 익숙했고, 수치심은 트라우마처럼 나를 괴롭혔다. 글쓰기는 나를 더 비참한 바닥으로 끌고 내려가는 듯했지만, 명 문장을 만드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애써 숨기느라 흩어졌던 다양한 감정들을 표현할 기회였다. 조지 오웰이 말한 대로 자기만족을 위한 글쓰기였고 돈이 되지 않은 글이었지만 나는 만족스러웠다. 책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나는 안정감을 느꼈고, 엄마의 품과 비슷하지 않을까 상상을 했다.
섬을 벗어났지만 스스로 섬이 되었을 때 비로소 나를 되찾을 수 있었다. 적절한 거리를 두고 방어막을 세우듯 문을 닫고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용서'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내 욕심이었다. 어떤 상태를 억지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가장 먼저 무지하고 나약해서 휘둘렸던 나를 용서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를 괴롭히던 가족들을 용서해 버리고 싹 지우고 싶었다. 하지만 용서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완벽한 상태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니 상황을 종료하겠다는 고집도 그만 부려야 했다.
모든 것이 완전해지고 편해지는 일은 없다는 것을 말이다.
법정스님이 말씀대로 우린 갈 곳이 정해진 사람들이다. 숙연해진 가슴을 위로하고 싶어서 오늘은 잠시 책을 내려놓고 내가 쓴 글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