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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ka Dec 30. 2024

누군가에게 예상치 못한 순간을 만들기

추리 수사물 장르 게임에서 빛나는 다중 루트와 무대 장치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에휴..


그리고 선택의 순간은 시시때때로 찾아온다. 마치 네오가 빨간 약과 파란 약을 선택해야만 했던 순간처럼 말이다. 일단 선택하기 전에는 @인지 @@인지, 딸기맛일지 모르는 것 아니겠는가? 결국 이 선택은 강제적으로 종용되며, 하나의 결말을 요구한다.


여기서 조금 재미있는 상상을 해볼까. 만약 여기서 네오가 약을 선택하고 하나의 결말에 도달한 후에, 시간을 돌려 다른 약을 먹어볼 수 있다면 어떨까? 아니면 둘 다 선택하거나 둘 다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전개가 있다면 어떨까? 그것 참! 생각만으로도 망설임은 줄어들고 부담이 덜어지는 것 같다. 그리고 결말에 대한 호기심과 약간의 고양감도 느껴진다.



|  선택의 중요성과 제3의 영역


이러한 서사 전개 방식은 게임뿐만 아니라 문학, 영화 등 여러 매체에서 이미 활용되고 있다. 참여자의 선택에 따라 여러 결말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수작수법인 것이다. 그리고 이 전개 방식은 멀티 엔딩으로 뻗어 나가는 다중 루트를 제공한다. 캐릭터와의 상호작용이 중요한 비주얼 노벨 장르나, 선택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는 캐릭터 육성 장르에서는 유저의 선택에 따라 여러 가지를 거쳐 하나의 결론으로 뻗어나간다. 물론 다시 플레이 함으로써 '다른 결말'에 도달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예상외로, 추리 수사물 장르 게임들에서 다중 루트 전개는 빛이 난다.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유저의 추리에 따른 가설과 검증, 해설일 것이다. 최근 플레이한 추리 수사물 장르 게임인 AI: 솜니움 파일파라노마사이트도 게임 플레이 내 여러 선택지와 다중 루트를 제공한다. 다만 이 게임들이 조금 특별한 점은 한번 루트가 오픈되면 언제든지 넘나들 수 있고, 이 다중 루트가 공유하는 제3의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게임에서 시각적으로 표현되는 다중 루트 순서도 (흐린눈)


그리고 이 다중 루트 전개 방식은 몇 가지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첫 번째는 게임이 과도하게 설명충이 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게임 시나리오나 디자인상 유저에게 세계관이나 로직, 이전에 일어났던 사건 등을 주입식으로 전달해야 할 때가 있다. 보통 플레이어 캐릭터의 독백이나 회상 씬,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타인과의 대화, 게임 내에서 접근할 수 있는 도감 등의 기록으로 종종 표현하게 되는데 이게 일정 선을 넘게 되면 TMI, 안물안궁, 버려지는 컨텐츠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에 그 적정선을 조정하기가 까다롭다. 다중 루트는 유저에게 이를 컨텐츠로써 전파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특히 추리 수사물 장르 게임에서의 다중 루트는 유저의 궁극적인 목표를 돕는다.


두 번째는 컨텐츠의 볼륨이 늘어나고 다회차 플레이가 가능한 점이다.

게임도 결국 소비되는 것이다. 새로운 시장의 흐름과 유저의 선택에 따라 언제든지 중간에 버려질 수 있다. 유저를 사로잡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다회차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점은 궁극적으로 유저를 락인Lock-in 할 수 있는 무대가 준비되어 있다는 뜻이며, 버려지는 컨텐츠 없이 소비될 수 있게 한다.

여기서 약간 주의해야 할 점은 다수의 유저가 경험하게 될 메인 스트림에서 은근슬쩍 빵가루를 흘렸다가, 이 장치를 통해 유저가 '궁금해할 만한 것'이나 유저가 '전혀 몰랐던 사실'을 선물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일한 상황에서 단순 카메라의 전환은 안물안궁이다. 유저는 이 재현 과정을 불필요하다고 느낄 것이며, 더 이상 시간을 쓰지 않을 것이다.



| 나는 A인가 B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솜니움 파일파라노마사이트는 다중 루트로 진행된다. 다만 솜니움 파일은 동일한 플레이어 캐릭터가 여러 루트를 진행하는 것이고, 파라노마사이트는 루트마다의 플레이어 캐릭터가 변경되어 진행하는 방식으로 차이가 있다. 이 부분에서 유저마다 재미있는 플레이 방식이 펼쳐질 수 있겠다. 어떤 유저는 '본인에게 주어진 캐릭터'에 몰입하여 행동할 것이다. 다른 어떤 유저는 '역할보다는 게임의 목적'에 충실하게 행동할 것이다. 혹은 '유저 자신이 가진 사상과 이념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 혹은 '둘 다'이거나.


스크립트 킬Script-Kill 이라 불리는 게임이 있다. 국내에서 알려진 크라임씬 방식으로 진행되는 게임이다. 정해진 스토리와 대본이 있는 상태에서 여러 플레이어들이 범인을 포함하여 등장인물별로 역할극을 하는 게임인데, 파라노마사이트와 같이 유저 혼자 1인 다역으로 플레이한다고 생각해 보자. 유저가 '범인일 때'는 어떻게 행동할까? 유저가 '범인이 아닐 때'는 어떻게 행동할까? 또는 '범인을 플레이한 후 범인이 아닐 때'와 '범인이 아닐 때를 플레이한 후 범인일 때'는 어떠한가?


이런 무대는 유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장르 게임을 즐길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렇게 수많은 무대를 제공할 수 있는 것도 다중 루트 게임이 가진 특권일 것이다. 다만 사용자의 모든 선택을 받아들이려면 무수하게 많은 가지를 쳐야만 한다.



| 유저의 관심을 끌고 행동을 유도하는 기믹


그럼 그 무대를 어떻게 꾸밀 수 있을까. 수용 인원에 따라 대극장과 소극장을 나눌 수도 있고, 조명이나 음악, 미술로 분위기를 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장르 게임의 무대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기믹gimmick이 설치될 수 있다. 만약 해당 장르 플레이에 능한 유저의 성향을 고려한다면 그 일이 있었을 때의 상황을 좀 더 전략적으로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장르 플레이에 익숙한 유저는 상황 판단이 빠르며 축적된 플레이 경험에 따라 '알고 있는 것'이 많다. 게임은 유저의 기대에 부응하는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




솜니움 파일의 아이보가 너무 귀엽다
플레이어A와 B와 C가 교실 한가운데서 B의 도시락이 없어진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 중이다.
플레이어A의 앞에 B가 있고, B 옆에는 C가 있다. 플레이어A와 B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 C가 고개를 돌려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1. 위 상황에서 플레이어A의 메시지 프롬프트에 '...어?' 라고 텍스트가 출력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순간 게임의 메시지는 유저에게 다소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유저가 깨우치지 못한 사이 혹은 깨우침과 동시에, 플레이어 캐릭터가 반응했기 때문이다.


2. 또 다른 상황으로는 의미심장한 효과음이 흘러나왔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플레이어 캐릭터는 알아차릴 수 없다. 무대 효과는 유저에게만 허락된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유저는 방금 무언가 '내가 알아야 할 것'이 전달되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3. 만약 프롬프트에 아무것도 출력되지 않고, 게임 내 변화도 없이 자연스럽게 상황이 흘러갔다고 가정해 보자. 이 순간에서 물음표는 오롯이 유저에게만 선사될 것이며, 무언가 깨달은 유저가 다른 패턴으로 게임을 탐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4. 위 상황에서 C가 약간 고개를 카메라 쪽으로 돌렸다고 가정해 보자. 그 순간 유저는 제4의 벽The 4th Wall이 허물어지는 묘한 느낌을 받게 된다.


솜니움 파일은 위 3번째 유형의 기믹이 등장한다. 나는 그 상황에서 '왜 갑자기 이게 나오지? 음?' 이라고 생각했으나 플레이어 캐릭터는 반응하지 않았다. 게임의 종반부에는 유저와 플레이어 캐릭터의 동기화율이 높아지며 상황이 반대가 된다.

파라노마사이트는 위 4번째 유형의 기믹이 등장한다. 이 장치는 나를 낯설게 했다Defamiliarization.



|  누군가에게 예상치 못한 순간을 만들기


용두용미라는 말이 있다.

작품의 시작과 끝이 용과 같다는 뜻이며, 작품성을 평가하기에 이만한 찬사는 없을 것이다.


나는 추리, 수사물 장르의 정수는 빌드업, 정교하게 계산된 각도의 떡밥 뿌리기 스냅과 빈틈없는 떡밥 회수에서 오는 짜임새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짜임새'야 말로 장르 컨텐츠의 흥행 성패를 가르고 갓or망을 결정짓는 요소인 게 아닐까. 특히 특정 장르의 팬들은 그런 부분을 감지하는 감각이 고도로 개발된 프로들이며, 그에 대한 기대치와 평가기준도 높은 것 같다. 결국 장르물은 고도로 훈련된 팬들을 '수준 높은 짜임새'로 만족시켜야 하는 사명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흠.. 어렵군요?


다만 그렇기 때문에 장르 게임이야말로 게임 내 장치나 연출을 활용하여 장점을 극대화되거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무대라고 생각한다. 뭔가 '예상 가능한 범위'에서 벗어난 색다른 상황을 짜볼 수도 있지 않을까? '장르 특성'에서 약간 엇나간 장치나 상황을 심어 보는 건 어떤가? 그 부분을 인상 깊어할 누군가가 분명히 있지 않을까?


몇 년 전 친구들 여럿이서 크라임씬 게임을 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범인으로 당첨됐고, (나도 범인 추리하고 싶었다…)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몰래몰래 해작질을 했다. 그리고 최종 투표에서 범인이 나 아니면 인물B로 판가름이 나는 상황이었다. 결국 나는 크라임씬에서 승리했다!

일의 전말은 이렇다.

나는 자기 방어를 위해 사건의 중심에서 많이 벗어나있었던 인물C를 타겟팅해서 범인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사실 인물C는 극 중에서 그다지 수상한 역할이 아니었다ㅎㅎ 그렇지만 뭔가 사건 외곽의 인물을 조명하는 것이 재미있을 것 같았다.) 나는 마지막 친구 직전에 투표를 하게 되었는데, 꽁지에 있던 친구가 나한테 '누구한테 투표할거냐' 라고 물었다. 나는 '흠... 그래도 나는 C'라고 말했다.

그리고 최종 범인이 밝혀지고 범인인 내가 최종 승리를 결정지었을 때, 나중에 친구가 본인의 추리 근거를 말해주었다. 그때 내가 심판받는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인물B에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인물C로 소신을 부림에 반해서(?) 내가 범인이 아니라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최근 들어 꽤 많은 추리, 수사물 장르의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다. 그때마다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들이 있을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게임은 예측 가능한 경우의 수 이상의 무대를 준비하며, 정교하게 안내선을 그어놓고 유저를 유도한다. 나는 감탄사를 장전하고 조심스럽게 안내선을 따라 움직인다. 그 안내선이 예상하지 못한 무대로 이끌어줄 것임을 기대하며. 그리고 그 무대가 나의 '예측 가능한 범위'가 되도록 나를 훈련시키기를 바란다.


나는 그 수많은 감탄의 순간들을 게임적 모먼트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그 어떤 놀라운 게임적 모먼트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와 응원의 말을 보낸다.




[1] 위키백과 -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

[2] AI: The Somnium Files (Steam) *자극적인 섬네일 주의

[3] PARANORMASIGHT: The Seven Mysteries of Honjo (Steam)*자극적인 섬네일 주의 

[4] Zero Escape: Zero Time Dilemma (Steam)Zero Escape: Zero Time Dilemma

[3PARANORMASIGHT: The Seven Mysteries of Hon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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