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라는 비상등 버튼을 남겨둔채 열심히 살기
살면서 좋은 일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게 계속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이유를 주지는 못했다. 대체로 좋은 일들은 일정 수준 이상의 시간과 노력과 마음을 쓰는 시간을 가져야만 얻을 수 있었다. 운이 좋게도 노력한 만큼 운이라고 부를만한 것들도 따랐다.
노력의 끝이 더 큰 노력이란 걸 알게 되었을 때도 특별히 억울하지 않았다. 친구는 허무하다고 했다. 대학만 가면, 취직만 하면 무언가 보장된 것을 기대했으나, 그게 또 다른 출발선이라는 게 허탈하고 배신감이 든다고 했다. 내가 조금도 허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그런 보장은 달콤한 거짓말 같다고 여겨서 그런가, 속았다는 기분까지는 들지 않았다. 역시 그럼 그렇지. 그럴 리가. 일 때문에 떨어져 산다던 엄마 아빠가 사실은 그냥 남이 되기로 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였다. 나는 어른들이 꽤 오랜 기간 했던 말이 거짓일 때도 특별히 놀라지도 속상하지도 않았다.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으려는 다짐을 하다가도 금방 맥이 풀렸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침묵을 지킨다. 나도 저렇게 해야지 했던 때도 있지만 ‘노력’이라는 말을 ‘애쓴다’라는 말로 대신한 이후부터 굳이라는 말이 늘 따라붙는다. 노력하지 마라고 말하는 건 어려웠지만 너무 애쓰지 마 하고 말하는 건 쉬웠다.
‘굳이’라는 단어에는 ‘단단한 마음으로 굳게’라는 자주 쓰이지 않는 뜻이 있다. 사람들은 이 단어를 언제나 단단한 마음을 풀어헤치는 데에만 사용한다. ‘굳이’라는 부사를 입 밖으로 말하게 된 이후에는 늘 말랑하고 무해한 것들을 찾아다녔다. 나에게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해롭지 않은 것들을 좋아했다. 밤에 뜬 별, 흐드러진 나뭇잎, 잔잔한 파도, 바람만 불면 예쁜 코스모스. 길 고양이를 마주치면 쟤는 누군가에게는 해로운 존재일까 싶다가도 무심하고 앙증맞은 발에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노력한 만큼 보상받지 못할까 봐 두려운 게 아니에요. 그게 100% 혹은 120%로 돌아온다고 해도 굳이 그렇게까지 하며 살아야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은 지쳐서 그렇다고 했다. 너무 열심히 해서 지쳐버린 거라고, 쉬고 나면 나아질 거라고 했다. 얼마나 쉬어야 하는지는 그리고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고 하는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남들이 어떻게 산들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하진 않지 하고 속으로 꿍얼거렸다. 정확히 말하면 남들이 그렇게 사는 것만큼 나도 이미 그렇게 살고 있어서 남들처럼 나도 계속 지친 상태였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유행할 때 혹은 그에 대한 비판이 유행할 때 어느 쪽이든 지겹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대학 다닐 때는 서점에 가면 어디에 미쳐보라는 말이 많았는데, 요즘은 뭐든 괜찮다, 네 인생이 아무리 사소하고 하잘 데기 없어도 괜찮다류의 글이 많다. 그런 글들은 읽지도 동의하지도 않았지만, 인터넷에 갓생 사는 법이 유행하고 모닝 루틴이 올라올 때도 난 늦잠을 잤다.
세상에서는 아래와 같은 고리가 계속 계속 반복됐다.
열심히 살자 -> 아니다 대충 살아도 괜찮다 -> 아니다 열심히 살아라 -> 아니다 그냥 대충 살고 네가 원하는 걸 하렴 -> 패배자처럼 주저앉아서 자기 위로하다가 나중에 후회하지 말아라 -> 아니, 그건 패배가 아니라 또 다른 삶이니 괜찮다
지겨운 유행이었고, 다음을 쉬이 예측할 수 있었다. 유행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삶의 방향을 찾고 정하고 살아가고,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더 공고하게 세워가고 있었다. 반면 여전히 나는 힐링도 해야 하고 성공도 해야 하고 재테크에도 관심 가져야 하고 현재를 즐길 줄도 알아야 하고 이미 가진 것으로도 충분히 행복해해야 하고 내가 가진 욕망과 가능성을 온전히 실현하라는 모든 멋진 것들을 한꺼번에 요구하는 세상 속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쓴다.
내 인생이 하잘 데기 없는 건 안 괜찮지만 어디에 온 마음을 기울여 미칠 생각도 없어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사회가 잘났다고 추켜세워주지 않는 것들에 나 스스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건 힘들었다. 그렇다고 사회가 잘났다고 추켜세워주는 것들을 계속 성취하기 위해 달리기에는 숨이 부족했다. 열심히 했는데 성과가 없는 게 힘든 게 아니라 그냥 뭘 계속 열심히 한다는 게 어려웠다. 배부른 소리지만 배가 고프고 싶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하며 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원하는 것이요? 노력 없이도 사람들이 손뼉 쳐주는 무언가를 가지고 싶어요.”
그런 것은 없다.
사회에서 인정해주길 바라지 않고 그냥 좋아하던 걸 하다 보니 성공한 사람들 이야기를 본다. 사회가 인정해주는 길이 아니라고 해서 그들이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어서 나는 또 작아진다.
“열심히 하고 싶지 않지만 뒤쳐지고 싶지도 않아요. 주변의 동의 없이 혼자 내 삶이 그래도 괜찮다고 확신하기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내가 나 혼자만의 세계를 구축할 자신이 없어요. 내가 뭐라고 그런 걸 홀로 스스로 구축하고 불안해하지 않고 살 수 있나요?”
노력하는 걸로는 충분치 않다, 잘하고 싶다. 잘해야 하고. 동시에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마음 한편에 늘 비상등 버튼처럼 남겨둔다. 계속 계속 노력했더니 또 다른 새로운 노력이 남았을 때 나는 비상등을 켜고 가만히 그냥 서있는다. 그러면 나는 그냥 잠깐 서있는데, 사람들이 앞으로 가서 뒤로 걸어버린 모양새가 된다. 억울하진 않았다. 그냥 계속 계속 열심히 했다면 어디까지 뛸 수 있었을까 가끔 궁금하고, 계속 계속 열심히 했다면 언제쯤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무너졌을지 궁금하다.
“네, 저는 만화 주인공이 아니어서 역경을 매번 이겨내기는 어렵습니다. 늘 그게 최선이었을까 하고 돌이켜보며 아쉬워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최선이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