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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상택 Sep 08. 2017

153. 보고타에서의 방심

2017년 9월 4~6일, 여행 348~350일 차, 콜롬비아 보고타


숙소 창가에서 보였던 길냥이. 뭘 그리도 빤히 쳐다보는 거니?

보고타에서는 사실 그렇게 오래 있을 요량은 아니었다. 다만, 도착한 첫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는 것 정도는 예상했고, 일요일이 껴있어서 교회에 가곤 하면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을 것은 자명했다. 3일째 되던 날 숙박을 연장했고 토요일과 이요일 중 하루는 우꾼의 펜팔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순조로이 풀려 가는 듯한 콜롬비아의 첫 일정은 우리의 방심으로 서서히 꼬여오기 시작했다.


기대 뒤를 쫓아오는 방심

사실 더 일찍부터 꼬여오기 시작한 일정이었다. 아니 꼬이기 전에 우리가 알아차렸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도착한 날인 9월 1일은 금요일 있고, 다음 날인 토요일 우꾼의 펜팔 친구를 만나기로 했었지만 바쁜(?) 그녀의 일정 때문에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하루가 사라졌다.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그게 기분 나쁜 건 아니었지만 사실 그날이 우리가 돌아다니기에는 최적기였다. 주일을 보낸 월요일은 대부분의 박물관이 휴관일인데다가, 다가오는 6일에는 보고타에 교황 방문이 예정되어서 여러 기반 시설들이 교황 맞이 준비로 분주했기 때문이다. 졸지에 '거리'가 꽤 다양한 이 곳 보고타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줄어든 것이다. 우리가 펜팔 친구에게 건 기대가 커서였을까? 다행히 연락이 끊기는 상황은 아니었고, 월요일 저녁에 볼 수 있다는 이야기에 일단 오늘의 외출을 시작했다. 우리가 머문 숙소는 시내 중심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기에 보고타 도착 4일째가 된 날에서야 보고타 시내 중심으로 향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보고타 중심가에 위치한 보테로 박물관(Botero Museo)였다. 콜롬비아 출신의 미술가 페르난도 보테로의 작품들이 주로 전시된 곳이다. 오기 전에는 보테로가 누군지도 몰랐다. 중/남미 전반적으로 정보가 없이 왔기에 더더욱 그렇지만, 애초에 미술에 큰 관심이 없어서 미술관이나 박물관에는 정보 없이 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내가 보고 느끼는 바를 그 작가의 전부로 이해하는 경향이 크다. 이번에도 물론 그랬다. 늘 '예술이 별거냐, 내가 느끼는 게 다지 뭐'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무튼, 보테로의 작품들은 대체로 일상에서 그 주제를 찾고 표현하는데, 표현 방법이 독특하다. 대상을 통통하게(!?) 그려낸다.

보테로 박물관의 입구. 이 입구는 바로 옆 주폐박물관과 현대미술관과도 연결되어 있다.

처마에 앉아있는 파랑새는 파란색 '러버덕'처럼 뒤뚱 거릴 것처럼 그리고, 바나 나하며 배하며 어느 하나 통통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니 사람은 어떻겠는가!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모나리자'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나리자가 맞기는 하는데 다른 사람(?!) 이 대신 앉아있다. 그 외에도 유명한 고전작품을 그의 독특한 화풍으로 풀어낸 경우가 많은데, 그림 자체가 재밌어서 보는 것이 지루하지 않았다. 미술을 몰라도 일단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그림들이다. 그리고 남미 사람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밀착형 소재의 그림들이 많이 있어서 좋았다. 이 밖에도 보테로가 영향을 받은 작가들의 그림도 함께 전시되어 있는데, 유럽의 다른 미술관에서도 쉽게 보기 힘들었던 달리의 조각상과 피카소의 그림도 있어서 신기했던 시간이었다.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언덕을 따라 내려가면 볼리바르 광장과 대 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수많은 비둘기 떼들과 모이를 파는 장사꾼들, 그리고 휴식을 취한 시민들이 몰린 광장은 북새통이었다. 게다가 교황 방문을 앞두고 성당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교황 방문은 이 곳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순간이 될 진 모르겠지만, 나 같은 여행자들에게는 그렇게 유쾌한 방문은 아니다. 공원에서 잠깐의 여유를 즐긴 뒤 센트로 거리를 조금 더 배회했다.

우꾼의 친구를 만날 거라는 생각이 없었다면, 더 일찍 더 많은 곳들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방심의 결과로 주말을 버렸고 평일 낮 센트로의 단편만을 봐야 했다. 방심의 결과다. 기대를 하면 늘 마음이 편해지고, 마음이 편해지면 방심할 수밖에 없다. 


안락함이 길어지면 야성을 잃는다

고산이라 해가 순식간에 진다. 센트로에서 미술관과 거리 산책을 마치고 나니 어느덧 해가 지려했다. 보고타 시내 전경을 볼 수 있는 몬세라트 언덕으로 갔다가 저녁에 우꾼의 펜팔 친구를 만나기로 해 서둘렀다. 아쉽게도 올라가는 길에 이미 해는 많이 넘어가 있었고 일몰과 야경을 몬세라트 언덕에서 볼 수 있었다. 혹자는 보고타의 야경이 남미에서 볼 수 있는 야경 중 최고로 친다고 하는데, 이런 야경이나 일몰, 일출은 이제 너무 많이 봐서 조금은 비슷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다. 보고타의 야경은 뭐랄까, 마치 LA의 야경을 보는 것 같았다. 서구권에서 도시가 계획적으로 개발된 곳은 격자 형태를 잘 띠는데 보고타에서도 그런 형태가 잘 드러났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아직 백열등을 많이 쓰는 가로등 때문인지 노란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는 것 정도. 그렇다고 안 이쁘다는 뜻은 아니고... 하지만 이 사진을 찍을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나에게 찾아올 보디블로(복싱에서 복부를 가격하는 대미지가 적은 공격)가 쌓이고 쌓여 나를 힘들게 할 줄은.

밤이 된 보고타는 땅과 하늘이 뒤바뀐 모양이다. 밤의 땅이 낮보다 따스하게 바뀌니까.


첫 번째 보디블로는 몬세라트 언덕에서 우군 펜팔 친구와의 약속 장소로 가는 택시였다. 알아본 요금보다 60% 정도 비싼 금액이었지만, 시간도 늦었고 택시도 없어 울며 겨자먹기로 탔다. 외국인이니 그 정도 금액을 내더라도 별 수 없지라는 생각과 둘이서 내니 부담이 그렇게 큰 가격(인당 1불 남짓)도 아니라서 그냥 내기로 했다. 고액권 밖에 없어서 고액권을 내고 나서 잔돈을 받았고, 이 잔돈으로 우꾼과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위폐(위조지폐)였다. 택시 기사가 잔돈을 위조지폐로 줄 줄이야. 중미에서 이런 일이 흔하다는 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이는 아프리카나 이집트, 터키 등지에서도 간간히 있는 일이라 조심했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명백한 나의 실수였다. 어쩔 수 없이 우꾼에게 신세를 지고 친구를 만났다.


 

카라히요. 커피에 콜롬비아 전통주(또는 브랜디) 를 섞어 먹는 방식. 원래 가격은 1불인데, 난 40불 내고 마셨다 ^^


내 지폐가 위폐라니! 5만 페소, 한화로 약 14불이 사라진다

두 번째 보디블로는 첫 보디블로의 회복이 끝나기도 전에 찾아왔다. 펜팔 친구를 만났고, 간단한 대화를 한 후 카페로 이동해 커피를 마셨다. '콜롬비아에 왔는데, 커피는 마셔봐야지!'하는 마음과, 과테말라에서도 펜팔 친구에 대한 좋은 기억이 있었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데 응당 대접해야 지하는 생각에 계산대로 가 내가 가진 고액권을 제시했다. 그런데 직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Falso'. 가짜란다. 내가 가진 고액권이 가짜라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것이, 이 고액권은 ATM에서 출금해서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너무 당황했지만 빨리 계산을 끝내고 싶어 다른 지폐 한 장을 더 꺼내어 계산을 시도했는데 두 번째 것도 가짜... 아무리 위폐가 많이 돌아다닌다고 해도 ATM에서 위폐가 인출된다는 게 가당키나 한 것인가. 결국 난 위폐 덕분에 커피값과 점심값으로 40$(한화로 약 45, 000원)을 지출해야 했다. 나의 멘틀은 이때 반쯤 작살(?) 이 나 있었다.

마무리는 돌아오던 길, '위폐를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하나? 나는 왜 이걸 확인을 못했나?'를 계속 생각하다가 발을 헛디뎌서 완전히 발목이 꺾여 버렸다. 발목이 꺾이는 순간, 내 머릿속 무언가도 꺾이면서 번쩍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이런 곳이었는데, 내가 야성을 잃었구나!


중/남미, 부정부패의 온상이며 강력범죄율이 엄청난 곳이다. 그간 동행도 있었고 운도 좋아서 안전히 다닐 뿐이었던 것이다. 위폐 통용률이 꽤 된다는 이야기도 이미 익히 들었던 바였고, 위험하다는 것도 꽤 들었던 것인데 그동안 그것을 내가 간과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어디서나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멘틀이 생겼지만 그건 다시 말해 어디서나 쉽게 방심할 수 있는 자세가 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사자가 초지에서 벌러덩 누워 잘 수 있는 것은 야성의 발톱을 가진 채였지만, 그걸 잃는다면 초지에 나온 고깃덩이 라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40불의 좋은 경험으로 생각하고 경각심을 환기시키기로 했다. 조심, 또 조심!


끝까지 방심하지 말 것

원래 어제가 마지막 날이었고, 4일에 보고타를 떠나 다른 도시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우꾼의 펜팔 친구가 가져다줬어야 할 물건을 가져다주지 않아서 하루를 연장해야 했다. 기왕 연장한 김에 보고타 근교로 가서 볼 수 있는 것을 보려고 했다. 보고타 근교의 유명한 것 중 하나는 소금 성당이어서 그것을 보기 위해 기차역으로 향했다. 귀여운 기차역이 있는 곳에 도착했지만, 우리는 기차를 탈 수 없었다. 소금 성당으로 향하는 기차는 매 주말만 운영된다는 것. 버스를 타고 갔으면 갈 수 있었지만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방법을 몰라서 깔끔히 포기했다.

보고타 북부에 위치한 우사켄 역. 하지만 기차는 주말에만 달린다는 점을 명심하자....

결국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 센트로로 돌아가서 어제 보지 못한 금 박물관을 다녀와보기로 한다. 콜롬비아부터 볼리비아까지 발달한 안데스 문명은 특히나 금속을 잘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뿐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금속들로 만든 공예품들을 볼 수 있으며, 세밀한 공예품들을 만들 수 있는 원리 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밀랍을 이용해 만든 금속 세공품들. 섬세하게 만든 그들의 솜씨가 대단했다. 박물관 한편 아이들이 우르르 온 것도 재미있었다. 박물관 해설사가 따라다니며 설명해 주고 있었는데, 동양인인 나를 보자 중국부터 자기가 아는 모든 아시아 나라의 이름을 대며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맞추려고 했다.

금 박물관을 벗어나 센트로 이곳저곳을 둘러본 뒤 우꾼의 친구를 기다렸다. 약속한 장소에서 한 시간 조금 넘게 기다렸을까? 결과적으로 친구는 오지 않았다. 너무 바빠서 나올 수 없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나도 나지만 우꾼은 멘틀에 꽤 큰 대미지를 입었다. 아무래도 물건을 건네받지 못한 부분도 그렇지만 본인 때문에 같이 하는 일정도 늘려가면서 기다린 것인 데다가 본인과 약속한 부분을 지키지 못한 친구에게 꽤나 실망한 것 같았다. (물론, 다행히도 떠나기 전 우꾼은 친구에게 물건을 전해 받을 수 있었다. 그마저 못 받았으면 더 속상했을 것이다.)

무엇인가 보고타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우리에게 '그 어떤 요소에 대해서도 끝까지 방심하지 말아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외적인 상황부터 내적인 상황, 인간관계까지. 나나 우꾼이나 너무 방심한 탓에 금전적인 부분 혹은 인간적인 부분에 대해 상처를 받았으니 말이다. 


사실 이런 것들 때문에 보고타에서의 일정이 안 좋게 기억될 뻔도 했지만,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 것은 보고타 에어 비 X비의 호스트였다. 바빠서 자주 마주하지는 못했어도 우리를 항상 신경 써주었고, 떠나는 날 아침 먹고 가라면서 맛있는 음식도 해주고, 나가는 버스 늦다고 하니 더 있다 가라고 배려까지 해주었던 호스트였다. 


보고타를 떠나던 날, 

마음 두지 못한 곳으로부터 오는 친절이
방심으로부터 온 상처를 치유하기도 한다

하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서 피어오르는 나였다. 다음 도시에서는 상처받는 일 없이 행복한 일정이었으면!



P.S.

쇼핑몰 위에 달린 스크린으로 축구를 보던 사람들

내가 보고타에 머무는 동안 이래저래 행사가 많다. 하필이면 우꾼의 펜팔 친구를 기다리던 날 중 하루는 브라질과 콜롬비아의 축구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다행히 보고타에서 경기가 있던 것은 아니라서 혼란스러운 건 없었지만, 지나가던 사람들이 골을 넣거나 아쉬운 장면이 나올 때면 멈춰 서고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쇼핑몰에서 기다릴 때에는 사람들이 다 하늘을 보고 있어서 뭘 보나 싶었는데 천장에 달린 화면을 보고 있었다... 또 다른 행사는 교황님의 방문. 덕에 20분이면 갈 숙소에서부터 터미널까지의 거리를 한 시간 반이 넘는 시간에 걸쳐서 도착해야 했다.

교황님, 다음부턴 제가 있는 곳 피해서 와주시면 안될까요. 택시비가 두배나 나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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