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0-13일, 여행 415-18일 차, 파라과이
돌이켜 생각해 보면, 파라과이를 육로로 가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산타 크루즈 - 아순시온(볼리비아-파라과이) 구간은 비행기가 그리 비쌌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다만 중미에서 우꾼과 이동하면서 스스로 생각했던 한 가지 생각에 나도 모르게 매몰되었던 것 같다. "육로로 이동하자". 실제로 중미에서 생존을 전혀 보장하지 않는다는 파나마-콜롬비아 구간을 제외하고는 육로로 다녔던 것이 사실이니까. 그리고 파라과이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내 다짐에 대해서 후회했다. 고난 주간의 서막이 본격적으로 열린 것이다.
버스를 타기 전부터 느낌이 불안했다. 떨어져 나간 용접, 닫히지 않는 창문, 그리고 20여시간이라는 극악한 이동 시간. 나는 왜 고집을 부렸던 걸까. 당시에 불안한 마음에 카메라를 꺼내지 않았었는데, 초점 마저도 제대로 맞추지 않고 찍었던 걸 보면 사진 찍는 것 마저도 불안했으리라.
물론 산타크루즈를 비롯, 파라과이는 굉장히 고온다습한 나라이기 때문에 창문이 닫히지 않는게 큰 문제가 없...기는 무슨. 밤에는 일교차가 크고 습한 바람이 피부에 닿아 더 춥게 느껴졌다. 게다가 모래바람이라 온몸 곳곳이 찝찝하게 모래가 끼는 기분이었다. 더 무서운 사실은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이불을 받거나 갖고 왔는데, 나는 이불이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버스에서 주는 기내식을 먹고 처음으로 고통스러운(!) 경험을 했다. 국경에 도착하기를 그렇게 바랬던 적도 없는 것 같다. 동남아, 인도, 아프리카, 남미의 다른 나라들까지 왠만큼 힘들다는 나라들에서 수도 없이 버스를 타봤지만 이런 참담한 버스 컨디션은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다.
국경은 또 얼마나 무서웠는가. 다른나라에서는 그래도 짧은 영어가 가능했어서 겨우겨우 짐검사를 넘어갔는데, 볼리비아 남단 국경의 직원들은 영어가 전혀 되지 않아 중간 중간 들어있던 고추장이나 조미료들을 설명하는 것에 정말 애를 먹었다. 그 때 왜 나는 스페인어를 배우지 않았을까.
버스에서의 고난을 어찌어찌 힘들게 넘어 파라과이의 아순시온에 도착했다. 숨을 돌릴 틈이 없었다. 파라과이는 스쳐만 지나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일정을 1박만 잡아뒀다. 아무리 찾아봐도 아순시온에 대한 정보가 별다른게 없었기 때문이다. 찾을 때 마다 나오는 것은 아순시온 한식이 그렇게 맛있다는 말 뿐이었으니까. 결국 이구아수 폭포와 가까운 국경지역인 시우다드 델 에스떼(Ciudad del este)로 바로 이동하기로 했다. 어쩌면 이게 고난을 스스로 부른 패인인 지도 모르겠다. 낭비라 생각하지말고 한식이나 맛있게 먹고 푹 쉬고 이동할걸.
버스는 저녁 5시 경에 도착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다음 버스가 오후 6시에 거의 바로 있었고, 5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해서 12시가 되기 전에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내가 숙소는 11일로 예약을 했는데 도착 예정이 10일 밤 11시면 숙박비를 한 번 더 내야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의 숙박비는 터무니 없게 비쌌던 터라 최대한 잘 해결하는 쪽으로 생각해두고 일단 버스에 탔다. 이번 버스는 다행히 버스가 굉장히 깨끗하고 좋았는데, 다른 문제가 있었다. 너무 좋은 버스라 에어컨이 너무 잘나왔다. 혹시나 하고 긴팔 (심지어 겨울 외투)를 입기는 했는데... 그걸로 해결이 되지 않을 정도로 거의 냉동고 수준으로 에어컨을 틀어주었다. 바들바들 떨면서 버스의 내릴 시간 즈음이 되었을 때부터 잠도 안자고 지도를 잘 보다가 숙소 근처에 내렸다.
그런데 버스가 내가 예상한 시간보다는 1시간 정도 늦게 도착했다. 큰 도롯가에 내렸는데 근처에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지만 큰 은행과 심지어 맥도날드(!)가 불이 켜져있는 것을 보고 "위험하다더니, 늦게까지 가게가 하네" 라는 생각을 했다. 걸어서 30분 쯤 가서 숙소에 문을 두드렸는데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밤은 깊어가고, 인적은 없고, 어쨌던 위험한 도시라고 하는 곳에 혼자 있어서 무서워 지기 시작했다. 문을 두드리다가 혹시나 하고 문을 밀었는데 열리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들어가서 로비를 찾아보려 하는데, 로비랄 것이 없는 개방형 공간이었다. 그래서 카운터나 벨이라도 찾아보려고 하려는 순간, 갑자기 개들이 짖기 시작했다. 너무 놀랐는데, 개들이 있던 곳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주인이 강아지들과 같이 생활하던 것이었다. 기분이 나빠진 듯한 주인이 문을 열고 나와서 방 하나를 안내 했다. 다만 걱정이었던 것은, 예약 한 날보다 결과적으로 난 하루 먼저 온 셈이 된 건데, 이 부분에 대한 비용 이야기나 가능 여부를 말한게 아니라 그냥 방을 안내해주곤 돌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남미에서 사람믿지 말라'는 말을 워낙 많이 들었고, 또 위험한 도시라고 하니 괜시레 불안해졌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생각이 짧았다. 돈을 더 내야 할 것 같다는 생각 하나에 사로 잡혀서 숙소를 나서버렸다. 주인은 내가 나가는 것엔 별 관심도 없이 잠을 자고 있었어서, 여차하면 다시 돌아와서 어디든 있으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하고 다시 짐을 메고 나섰다. 아까 봐둔 맥도날드가 있으니까 거기서 밤을 보내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하지만 아주 안일한 생각이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가 마감 정리 중이었던 것이었고 숙소에 들어갔다가 나왔을 시점엔 이미 맥도날드가 닫은 것이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봤지만 숙소 문은 주인이 잠궈버렸다. 한 순간에 갈 곳을 잃어버린 것이다. 거기에 추운 버스 안에서 있었던 탓에 배도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 때가 새벽 2시였다. 화장실도 필요했고, 밤을 보내야 할 곳이 필요했다. 버스에서 내렸던 대로변 근처에는 쇼핑 몰들이 있는 곳 같아서 이곳 저곳 둘러보다가 경비아저씨가 있는 곳을 간신히 찾아 화장실은 해결했다. 경비 아저씨에게 혹시 지금 시간 갈 수 있는 곳이 있냐고 물으니 없다는 대답. 절체 절명이었다. 그 어두운 밤에, 그 무섭다는 파라과이 국경도시 CDE에서, 이렇게 비명횡사하게 되는 걸까. 어디든 들어갈 곳이 필요했고, 불이 켜진 곳을 일단 찾아보자고 돌아다니다 발견한 것이 ATM기계였다. 그때가 일교차가 있었다고는 해도 우리나라로 치면 늦여름 정도의 날씨라 반팔이나 얇은 긴팔이면 충분했을텐데, 올 때 탄 버스의 에어컨이 너무 추워서 인지 냉방병이 왔기에 겨울 외투를 다 꺼내 껴 입었다. 20여시간의 긴 이동때문에 잠은 오는데, 이대로 잠들면 그대로 장기가 털릴 것 같아서 잠을 자지 않았다. 다행인 건 ATM이 위치한 건물의 와이파이가 무료로 개방되어 있었어서, 급한대로 친구들과 연락하며, 드라마를 보며 밤을 지샜다. 머릿속으로 예수님, 하나님을 찾으며 '그저 살아남게 해주세요' 를 되뇌였던 것으로 기억했다. ATM을 찾았던 시간이 3시, 그리고 동이 트고 ATM을 떠나던 시간이 8시 정도였으니 5시간 정도를 두려움에 떨며 보냈다. 터키에 이어서 두 번째로 찾아온 위기상황이었지만, 내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측면에서 더 불안하고 두려웠던 경험이었다.
동이 트고, 숙소로 다시 이동했다. 너무 춥고 피곤했기 때문에 빨리 쉬고 싶었고, 동이 트고 나서도 주인이 일어나지 않았을걸 대비해 8시 정도에 찾아갔다. 어제와는 사뭇 다른 표정으로 맞이하는 주인의 얼굴을 보니 안심이 되었지만, 그 다음 나에게 전한 말은 절망이었다. "어젯 밤 네가 들어오면서 개들을 깨웠고, 덕분에 내 남편이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래서 널 손님으로 받지 말라고 한다."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심지어 나는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 하고 온 손님이었다. 갑자기 온 것이 아닌. 사정을 말하고 체크인을 해달라고 말했지만 계속 되는 대답은 NO였다. "그럼 환불이라도 해달라"고 말하니 인터넷 예약한 곳에서 알아서 처리하라는 답변 후로 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그저 8시가 되면 따뜻한 곳에 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는데 그대로 멘탈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다.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뭐한다고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이 지긋 지긋한 곳을 떠나고 싶어 ATM을 돌아가(...) 무선 인터넷으로 근처 가장 가까운 숙소를 찾았다.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숙소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누구와도 말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스페인어를 못하는 마당에 버스를 물어 물어 타는 것이 가능해 보일 거 같지도 않았으니까. 40여분을 터덕터덕 걸어서, 겨우 숙박을 할 수 있었다. 약 30여시간을 이동했고, 6시간 정도를 밖에서 떨고 나서야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이 그토록 고생했으니 몸이 버텨줄 리 없었다. 그대로 뻗어서 하루는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나마도 있는 수퍼마켓도 숙소에서 25분 거리였기에, 움직이기도 귀찮아 가방에 있던 비상식량을 먹고 하루 종일 누워만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바로 항공권 예약이었다. 시우다드 델 에스테에서 브라질 이과수를 보고, 아르헨티나 이과수로 또 이동한 다음 이과수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가는 항공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육로 이동을 생각했지만, 시간도 아깝고 이런 멘탈리티(?)로 무리한 육로이동을 하는 건 영 아닌 것 같아 바로 계획을 수정했다.
항공권을 검색해보니 가격도 80불 정도여서 빨리 사야겠다 싶어 결제를 시도하는데 계속 결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 와중에 거래가 실패하면서 티켓이 마치 구매한 것 처럼 처리가 되어 잔여석은 줄고 티켓 가격은 계속 올라 90불, 100불, 120불 마지막엔 140불이 되어 버렸다. 외국 카드에 대한 거래가 거절되는 것 같아 숙소 주인에게 수수료 10불까지 쥐어 주며 150불에 울며 겨자먹기로 티켓을 구매했다. 그리고 늘 그랬듯, 구매하고 나니 티켓가격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금전적 고난이 찾아온 것이다.
보통 이런 슬픈 일들은 몰아서 생긴다더니...한 세 개 쯤 왔으면 더 오지 않겠거니 싶어서, 그 다음 날에는 시우아드 델 에스테에서 몇 안되는 볼거리 중 하나인 이타이푸 (Itaipu) 댐을 보러갔다. 세계 최대 수량의 댐이었으나... 중국에서 만든 댐 때문에 2위로 밀려났다고.
댐에서 물이 방류되는 것은 건기인데, 지금은 우기여서 이미 강물이 흥건하다. 이 물을 따라가면 이과수까지 이어진다. 물 색을 보아서는 이과수도 흙탕물이 가득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안전하게 잘 이타이푸를 보고오나 싶었는데 고난은 절대로 호락호락하게 끝나질 않는다. 이타이푸에서 찍은 모든 사진이 날아간 것이다. 정확히는 메모리카드가 불량... 우꾼이 넘겨줬던 메모리가 불량 메모리카드였다니.
몸이 회복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메모리를 복구해보겠다고 밤을 새서 살린게 그나마 저 상태였다. 악재는 늘 몰려 온다더니, 이런 식으로 고통받을 줄이야. 그야말로 파라과이에서 나는 거의 버려지듯한 사람이었다. 그나마의 고난도 여기서 끝나면 좋겠지만... 아마 다음 연재분에도 고난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될 것 같다. 그야말로 내 여행에 있어서 약 2주에 가까운 고난 주간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