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인바디에서 내게 체지방 감량을 요구하지 않는다.(지독한 놈) 이번이 네 번째 감량이다. 시행착오는 많았고 덕분에 지금은 올바른 - 몸에 무리가 가지 않고 부상의 위험이 없는 - 방법으로 표준에 다다랐다. 또한 고등학생 때 이후로 가장 적은 체지방을 보유하고 있다. 다행히 그 어느 때보다 운동에 재미를 느꼈고, 운동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꾸준히 있었고, 식단과 영양을 챙길 돈이 있었고, 계속 밀고 나가려는 의지 한 스푼이 있었다. 표준이 된다는 건 이렇게 어려운 일이다.
나의 체지방은 표준 범위에 있던 적이 없다. 표준이 된 지금 표준에 대해 생각한다. 표준에 있는 건 어떤 기분인가. 웃옷을 벗어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다. 아웃핏에 대한 고민이 거의 없는 것이다. (아무나 자유롭게 입을 수 없는)프리사이즈 옷을 입을 수 있다. 연애 시장에서 잘 팔린다. 몸이 권력이자 자산이라면 표준은 중간 보스, 중산층 이상이 된다. 권력은 타인에게 휘둘러야 맛이니 남용되게 마련이다. 아무렇지 않게 오랜만에 만난 누군가에게 ‘살쪘네^^’ 라며 덕담을 건넬 수 있다. 더 나아가 살은 게으른 사람이나 찌는 거라고 힘주어 말할 수도 있겠다. 앞선 덕담과 웅변을 많은 사람들에게 건네는 게 취미이며, 그것에 대해 말조심을 하거나 의심을 갖거나 부끄러워하는 일 따위는 전혀 없다.(적어도 내가 본 사람들은 그랬다)
표준에 있는 자는 ‘살이 많이 빠졌네’와 ‘살 많이 쪘네’가 같은 말인 것을 모른다. 아무런 노력 없이 표준이라는 열매를 먹고 마시다 보면 아무렇게나 잣대를 휘두르다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다. 표준이 예기치 못하게 전복되어 본인이 그 잣대에 맞아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표준을 휘두르는 사람을 수없이 만났다. 체지방이 넉넉했던 20대의 9년간은 ‘살이 왜 이렇게 많이 쪘어?’라는 질문을 안부 인사처럼 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꺼져, 어쩌라고, 밥 한 끼라도 사주고 덕담을 건넬 것” 3종 세트를 개발해 응수했다. 요즘에 와서야 주목받는 바디-포지티브의 철학이 충만한 사상적 얼리어답터였다. 프리사이즈 옷에게는 저주를 퍼부었지만 살을 빼려는 노력은 없었다. 아주 잘 먹고 마셨다. 내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단 한 줌의 표준도 의식하지 않는 인간 또한 썩 매력적이지는 않다. 90kg의 나는 어땠나. 근거 없는 자기애로 충만했다. 자기애는 근거가 필요 없다. 누가 뭐라든 내가 나를 아껴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항상 타인은 나를 나대로 봐주지 않는다. 타인에게는 근거가 필요하다. 근자감이 충만하다면, ‘쟤 뭐 있나’ 정체를 궁금해하거나 ‘x신’ 비웃으며 지나가거나 둘 중 하나다. 어떤 잣대는 너무 싫지만 대다수의 타인이 갖고 있는 기준이라는 것을 아주 모르지는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그 사람들과 살을 비비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예 무시하는 것 또한 오만 아닌가. 그럴 때는 초인적인 힘을 내 그까짓 기준 위로 한 번 뛰어넘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잣대로 나를 재단하는 건 너무 싫지만 아무렇게나 나불대는 입들을 다물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표준을 정확히 응시해야만 했다.
지난 6년 동안 4번의 감량이 그 생각의 산물이었다. 그 시간을 보내고 나니 바디-포지티브의 개념이 다시 보인다. ‘내 몸은 니들 기준과는 다르지만 사랑해’라는 으름장이 아니라, ‘누군가에겐 좀 별로일 수 있다는 거 알겠는데 이 정도면 괜찮아. 나에게는 이 몸이 최선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줄 거야’라는 다짐이다. 고민하고 깨져보고 딛고 일어선 사람은 자세가 다르다. 나 이외의 타자와 외부를 인정해 봤으며, 그것을 가져보려 무던히 노력했으며, 마지막으로 ‘할 만큼 했다’며 끝내는 것, 그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보는 것, 그런 인간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생각해보니 표준은 죄가 없다. 다루기 나름이다. 물론 나는 아직 멀었다. 아직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