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에 부쳐
내가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이유는 아주 이기적인 마음에서다. 내 배우자가 세상과 부딪히며 겪을 일들, 내 엄마의 남은 삶. 그리고 내 주변의 친한 여성 인간들이 자기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것. 같은 사람끼리 억압받지 않고 잘 살았으면 해서다. 엄마, 애인, 여사친, 동료 등 살아오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여성이 겪는 불합리함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지만 그 상황 속에서 관조할 수밖에 없었던 그 기이함을 잊지 못한다. 들어주고, 위로만 할 수 있었던 무기력함을 기억한다. 사실은 남성으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아니라서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의 깊이를 미루어 헤아려볼 뿐이다.
나는 여성들이 겪는 억압과 남자로서 내가 갖고 있는 특권과 혜택을 일찍이 인지하게 됐다. 명절날 여자들은 음식을 준비하고 남자들만 절을 하고 앉아서 편히 밥을 먹던 기억, 왜 엄마랑 숙모들은 좁은 밥상에서 따로 먹을까, 아직도 직장에 다니는 엄마의 34년 독박 가사 외길, 여전히 가사에는 손 까딱 않는 아버지, 연극판에서 여성 배우들이 겪는 대상화, 여학생들이 학교 안팎에서 겪는 성희롱, 성인이 되어서도 느끼는 밤길의 불안이 기억난다.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현실의 이야기를 억지로 한 데 모아 놓았다고 말한다. 예술은 현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담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흩어져있는 것들을 모아서 보여주는 게 효과적일 수 있다. 최근 개봉한 영화로는 조커나 기생충 정도가 있겠다. 많은 사람들은 무시당하는 조커와 반지하 가난의 냄새라는 말에 공감하고 분노했다. 영화가 현실을 꼬집었다고 말한다. 김지영을 포함한 앞선 서사들은 모두 기본적인 인간 권리가 짓밟혔을 때 사람이 어떻게 미쳐가는지를 다루고 있다. 같은 이야기임에도 어떤 사람들은 여성 인권과 여성 서사에만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도 모자라 기를 쓰고 반대한다.
그건 어머니 세대 여성들의 이야기이지, 이제는 세상 좋아졌다고 한다. 글쎄, 어느 세상에 사시나요. 내 주변은 아직 아닌 것 같은데. 왜냐하면 여성들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좋아진 것에 판단은 남성이 나서서 할 말이 아니라 당사자인 여성이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좋아진 게 누구 덕분일까, 확실한 건 ‘좋아졌다고 말하는 사람’ 덕분은 아니다. 서로를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냥 이해가 불가능한 영역이라 생각하는 게 낫다. 그래야 우리는 이해하려 노력을 할 수 있지 않나 싶다. 누군가를 쉽게 판단하고 단정 짓지 말자. 내가 그렇게 되고 싶지 않듯이.
남성은 이 사회에서 가해자로 양육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항상 조심스럽다. 의도했든 안 했든 나도 가해자였다. 방관하고 동조했다. 한나 아렌트 누님 말씀처럼 악은 평범한 얼굴을 띄고 있다. 우리는 너무 평범하고 악하게 키워졌다. 나의 평범함과 무지가 누군가에게는 너무 쉽게 악이 될 수 있다는 걸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제 다 컸으니 사회가 양육한 대로 생각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생각할 때이기 때문이다. 내내 부끄럽고 미안하다. 그러나 그쪽 편이 되기로 마음먹은 이상 남은 삶은 이제라도 맞는 방향으로 목소리 내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아주 이기적인 이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