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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훈 Feb 26. 2020

바이러스 디스토피아

우리는 인간성을 지킬 수 있을까

 지난주 내가 있는 사무실 11층에서는 기침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누군가 연달아 기침을 해댈 때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공기 중으로 바이러스가 배출된 것은 아닐까. 어딘가에 묻지는 않았을까. 사실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어디쯤 앉아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대화를 한 것도 아니고 손을 잡은 것도 아니다. 그냥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을 뿐이다.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많이 두려워했다.


 전염병 창궐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실체를 갖춘다. 회사 측에서는 소재지인 성남에서 확진자가 발생한 날, 재택근무 체제로 즉시 긴급 전환했다. 뉴스에서는 연일 디스토피아가 펼쳐진다. 마스크는 품귀현상을 겪고, 온라인 쇼핑몰들은 배송에 허덕인다. 사람들은 외출과 모임을 자제한다. 결혼식을 취소하는 사람은 위약금에 분통을 터뜨린다. 정부는 환자들의 동선을 일일이 추적하고, 지자체는 종교시설을 폐쇄한다.(이 와중에 마스크 산업만 호황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소설 같은 일들이 모두 일어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비현실적인 일들이 구체적으로 발생하고 있어서 두렵다. 이 두려움의 낯을 기록해두고 싶다.


 전염성은 인간 사이의 무언가를 깨뜨린다. 타인의 존재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인간성을 유지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이미 인터넷 댓글 속 일부 말들은 인간성을 잃은 지 오래다. 어떤 말들은 누군가에 대한 욕으로만 점철되어있다. 우리가 어떤 곤경에 처했을 때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나 말고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탓하는 것이다. 중국인을 탓하고, 교회를 탓하고, 정부를 탓한다. 모든 것들이 무능하며 이 정도까지 오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마치 이렇게 되기를 정확하게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저기, 예지력이 있다면 먼저 가서 미리 말해주지 그랬어요.


 제시할 수 있는 대안과 건전한 비판이 있는 게 아니라면 탓하고 싶은 본능을 억제하는 게 최소한의 인간성이라고 생각한다. 탓하는 감정은 너무 쉽게 혐오로 흐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여서 ‘으으 중국인’ 할 거면 외국인들이 ‘으으 한국인’ 하는 것도 너그러이 이해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싫다면 특정 집단을 싸잡아 혐오하거나 비난할 수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이 더 많다. 하지만 교회를 전적으로 탓할 수 없다. 우리도 어쩔 수 없이 매일 누군가와 모이기 때문이다. 내가 질병관리본부 담당자라면, 지금 누구를 혐오할 때일까? 질병관리본부 담당자는 한 달만에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더 생산적인 비판은 없을까? 이런 생각의 과정을 옛 선인들은 역지사지라고 말했던 것 같다.


 다음번 확산은 이번 주가 결정적인 고비라고 한다. 당분간 두려움은 계속될 것 같다. 누굴 탓하기보다 타인이 느낄 수 있는 두려움들에 대해 생각한다. 누군가는 바이러스보다 당장의 생계를 해결하는 게 더 두렵다. 운 좋게 정규직이 된 나는 당장의 생계를 걱정하지 않는다. 휴업, 휴직, 휴가도 쉽게 사용 가능하다. 그러나 누군가는 최소한의 그들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바이러스를 뚫고 일을 마치고 돌아온 이가 가족에게 갖는 미안함의 깊이는 어느 정도일까 헤아려본다. 일을 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으나, 일을 하러 나가는 게 가까운 존재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일이 된다.


뉴스를 보니 <한 달 임대료를 받지 않는 건물주>처럼 촉촉한 소식도 있다. 비단 이런 호혜적 관계가 아니더라도, 존재 자체가 위협이 되는 상황에서도 인간은 서로를 꼭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을 느낀다. 사태가 장기화됐을 때, 질병과 어려운 생계 모두를 같이 버텨낼 수 있는 제도적 방법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은 그걸 고민하는 게 가장 생산적인 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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