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탑건: 매버릭>을 보고
<탑건: 매버릭 (Top Gun: Maverick)>은 개봉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영화다. 이미 완성됐지만, 코로나19 여파로 극장 개봉이 무기한 연기됐다가 팬데믹이 수그러들면서 드디어 올해 여름 관객들을 만났다. 개봉 전부터 영화가 잘 나왔다는 입소문이 돌았고, 1억 달러를 훌쩍 넘긴 수익을 기록하며 첫주 북미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랐다. 개봉 4주 차에 접어든 영화는 북미에서만 흥행수익이 5억 달러에 육박한다. 근 10년 이내 개봉한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중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를 포함해서도 최고 성적이라 할 수 있다.
<탑건: 매버릭>은 평단의 극찬과 최고 흥행수익의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다. <오블리비언(Oblivion)>으로 톰 크루즈와 호흡을 맞췄던 조셉 코진스키의 연출은 안정적이고, 전투용 비행기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줬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액션이 볼만하다. 전편으로부터 이어지는 갈등 관계의 형성과 해소가 명확한 플롯, 빠질 수 없는 로맨스가 있고, 적절한 감동을 자아낸다. 여기까지는 1편을 관람하지 않은, 그리고 당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를 관람할 수 없었던 세대까지도 모두 사로 잡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단순히 만듦새만 두고 이 영화의 가치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시작부터 끝까지, 시간을 아로새긴 영화는 할리우드의 역사, 그리고 할리우드의 가치까지 이야기한다. 마블 영화에 길들여진 현 세대에게 이 영화가 어떻게 보였을지 모르겠으나, <탑건>이란 영화를 즐겼던 세대에게 향수를 불러일으켰다는 평가 이상으로 이 영화는 현재의 할리우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프닝 크레딧에서부터 영화는 역사를 드러낸다. ‘돈 심슨-제리 브룩하이머 프로덕션’은 1986년 <탑건>을 제작했고, 지금까지도 할리우드 최고로 군림하는 대표적인 영화제작사이다. 1990년대 중반에 동업자 돈 심슨이 사망하면서 지금의 ‘제리 브룩하이머 프로덕션’이 됐지만, 1편을 제작했던 만큼 원판인 ‘돈 심슨-제리 브룩하이머 프로덕션’ 크레딧이 그대로 등장한다. <탑건>은 제리 브룩하이머와 돈 심슨을 할리우드 최고 제작자 대열에 합류케 해준 영화였다. 이미 <베벌리힐스 캅(Beverly Hills Cop)>과 <플래쉬댄스(Flashdance)>로 MTV 세대 취향의 감각적인 영화를 만들어 시장에서 성공했던 두 사람은 토니 스콧을 기용해 완성한 <탑건>으로 할리우드 최고임을 공고히 했다. 이후 이 제작사에서 나온 영화들은 주로 남성 위주의, 테스토스테론 향취를 물씬 풍기는 묵직한 액션물(<나쁜 녀석들(Bad Boys)>, <더 록(The Rock)>, <콘 에어(Con Air)> 등)이나 감각적인 오락물 (<코요테 어글리(Coyote Ugly)>)이었다. 2000년대 들어 <내셔널 트레저(National Treasure)>와 <캐러비안의 해적(Pirates of the Caribbean)>까지 성공하면서 제리 브룩하이머는 할리우드에서 승승장구했다. 2013년 <론 레인저(The Lone Ranger)>가 흥행에 실패하며 한동안 영화에서 TV로 작업전선을 전환했지만, 그는 이미 다른 제작자들은 해내지 못한 많은 것들을 성취해냈다.
그가 제작한 영화들은 주로 관객들의 취향과 관심을 반영한 것들이었다. 소설이나 코믹스처럼 이미 나와 있는 것을 그대로 차용하기보다 창작된 이야기 또는 캐릭터에 기반해서 개발된 시나리오를 영화로 제작했다. <베벌리힐스 캅>이나 <내셔널 트레저> 등이 모두 그 결과다. 뻔한 클리셰 덩어리라 욕은 먹을지언정, 관객들은 그가 제작한 대부분의 영화들에 화답했다. 최소한 현재 양산되는 마블코믹스 영화들이나 프랜차이즈물보다 훨씬 모험적인 시도들이었으며, 상대적으로 다양한 캐릭터, 다양한 이야기와 감동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독특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선보이는 감독들을 적극 기용한 제작자이기도 하다. 광고나 뮤직비디오를 주로 만들던 토니 스콧이나 마이클 베이는 제리 브룩하이머 덕분에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자신들의 시그니처를 심어 넣을 수 있었다. 성공한 영화제작자들 틈에서도 영화의 재미와 완성도, 흥행성을 모두 지켜내려 노력하며 그 옛날 영화제작자들의 명맥을 이어가는 독보적인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탑건: 매버릭>은 진짜 영화를 기획할 줄 아는 제작자가 작심하고 만든 영화라는 점에서 괄목할만하다. 아주 오래전에 쓸만했던 카드를 다시 꺼내 들었는데, 명민하게도 흘러간 시간을 온전히 반영하면서 그 근원이었던 1편을 환기시키며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주인공과 이야기에 집중하는데 성공한다. 자신만만한 캐릭터의 상징적인 미소, 선글라스를 낀 채 오토바이를 타고 활주로를 질주하는 모습, 작렬하는 태양 아래 정렬된 전투기와 항공모함 등 1편의 성공포인트는 2편으로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것을 완성시키는 데에 일조했던, 80년대 당시 형만큼이나 영상에 관해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던 토니 스콧은 가슴 아프게도 이 속편에 함께 참여할 수 없었지만, 1편의 유산(legacy)은 고스란히 2편으로 이어진다. 브룩하이머가 집중한 것은, 세월이 지나도 사라질 수 없는 가치, 바로 그것일게다.
비교적 최근 개봉했던 <블레이드 러너 2049 (Blade Runner 2049)>도 무려 35년 만에 완성된 속편이었기 때문에 <탑건>의 재등판이 낯설진 않다. 특히 <블레이드 러너>나 <탑건> 모두 전편에 이어지는, 주연 배우들이 그대로 등장하는 영화들이란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며 속편화의 방식이 유사하지만, 큰 차이가 있다면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주인공은 해리슨 포드가 아니었고, <탑건: 매버릭>의 주인공은 톰 크루즈라는 사실에 있다.
한 배우가 자신의 주연작 속편에 거의 40년 이후 다시 주연으로 출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가는 세월을 정통으로 맞아 나이 지긋한 노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탑건>에는 그래서 대부분의 배우들이 출연할 수 없었다. 크루즈의 상대역이었던 캘리 맥길리스나 팀 로빈스, 멕 라이언 등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출연한 배우가 발 킬머인데, 그마저도 톰 크루즈와 비교한다면 나이 지긋한 모습이다. 구강암을 앓고 있는 그의 현실이 영화 속에도 그대로 반영된 점은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이 와중에 톰 크루즈는 주인공 매버릭이 되어 등장한다. 대개 이런 류의 속편에는 전편 주연배우가 젊은 배우들을 앞세워 조력자 정도로 등장한다. 톰 크루즈 역시 이 영화에서 마일스 텔러의 조력자, 스승으로 출연하지만 비중과 설정 등을 감안한다면 톰 크루즈 원탑 주연이라 봐야한다. 1편과 2편 사이에 존재하는 36년이라는 세월은, 영화 안팎에도 유효해서 캐릭터와 그를 연기한 배우 모두 늙어버렸다(혹자는 톰 크루즈가 그 옛날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하지만, 톰 크루즈는 이미 <잭 리처(Jack Reacher: Never Go Back)> 2편에서부터 외모가 확연히 달라졌다). 1962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이미 환갑인 그가 20대 초반 때와 완벽히 같다면 그건 CG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톰 크루즈는 60대에 육박한 나이임에도 몹시 건강하고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톰 크루즈가 아니었다면 이 결과물은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속편이 기획되었더라도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 공산이 크다. 영화 속 매버릭은 나이듦에 따라 늘어난 경험치와 관록을 자랑하며 깊은 이해심을 자랑하는 성숙한 인간으로 다루어졌겠지만, 여전히 꿈을 꾸며 자신의 일을 멋지게 해내는 현역으로 묘사되진 못했을 수 있다. 아직도 ‘대령’으로 매버릭이 마하 10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톰 크루즈라는 배우 덕분이다. 그는 20대 초반일 때에도, 그리고 60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을 때에도, 엔간한 달리기 운동선수처럼 멋지게 뛰며, 늘어짐없는 근육을 자랑하고 시원하게 상반신을 노출할 수 있다. 눈매는 달라졌지만, 동년배 배우들보다 훨씬 젊은 모습으로 줄어들지 않은 까만 머리숱까지 자랑한다. 극중 인물들이 지적하는 그의 건방진 미소는 <탑건> 외에도 이미 수많은 영화들에서 보아왔지만, 이번 영화에서만큼은 그 미소가 건방져 보이지 않고 관록 넘치는 자신감으로 읽힘을 이 영화를 본 많은 분들도 알 것이다. 나이를 거의 먹지 않은 얼굴과 육체뿐만 아니라 캐릭터도, 배우도 모두 성숙했음을, 이 영화는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톰 크루즈는 과거와 현재 모두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할리우드 스타이다. 그처럼 커리어 내내 상위에서 내려오지 않은 배우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특히 단 한번도 망가짐이 없이, 스크린 안팎에서의 이미지를 잘 지켜낸 배우이다. 2000년대 중반 <미션 임파서블3>의 (예상 외) 흥행 부진과 케이티 홈즈와의 세 번째 결혼으로 조롱에 가까운 미디어의 반응이 쏟아질 때에도 톰 크루즈는 묵묵히 작품 활동에 임했다. 그리고 2010년대 들어 <아메리칸 메이드(American Maid)>나 <잭 리처2>가 썩 좋지 않은 흥행성적을 내고 <미이라(The Mummy)>가 최악의 평가를 받았을 때도 있었지만 그의 행보는 일관적이었다. 쉼없이 작업했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관객들의 반응은 들쑥날쑥했지만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를 쥐고 그는 여전히 할리우드에서 거래를 할 수 있는 배우였다. 끊임없는 노력 끝에 그는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줬던 36년 전 <탑건>의 속편으로 다시 한번 완벽한 스타임을 입증한 셈이다.
솔직히 <탑건>의 속편이 제작된다고 했을 때 <원초적 본능2>처럼 되지 않을까 우려스러웠다. 대개 배우들은 커리어가 하향곡선을 그릴 때 자신의 흥행작 속편에 참여한다. 속편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야 그 배우가 현재도 잘 나가고 있다는 방증이 됐다. 그렇기에 톰 크루즈가 내리막을 걷는 게 아닌가 싶을 때 나온 이 프로젝트 소식이 달가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역시 톰 크루즈는 몇십 년간 자신의 커리어를 지독히 완벽하게 지켜온 배우인 만큼 훌륭한 선택을 했다. 극장문을 나서며 가장 처음 입밖으로 나온 이야기는 “영화에 나온 젊은 배우들을 다 합쳐도 톰 크루즈 하나만 못하다” 였다. 톰 크루즈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완벽한 할리우드 스타이고, 이 영화는 그의 40년 넘는 커리어를 집대성하기에 완벽한 걸작이었다. 이처럼 완벽한 배우는 그의 시대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