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저 멀리 반짝이는 별 Jul 03. 2022

1990년대, 할리우드

01. 데미 무어 Demi Moore.

1992년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시상자로 나선 데미 무어. ⓒ2022. IMDB All Rights Reserved.

지금의 20대, 30대들에게 데미 무어란 배우를 아냐고 묻는다면 잘 모른다고 답하거나 ‘애쉬튼 커처의 연상녀’ 정도로 답할지도 모르겠다. 그마저도 과거가 되어 ‘버림받은’이란 표현이 나올 수도 있고, ‘비참한 자서전’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다. 요 근래 출연작으로 이렇다 할 영화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활동마저 미미하지만, 데미 무어는 (사람들은 모르지만) 여전히 많은 작품들에 출연 중이며, 비교적 최근까지도 가십에 오르내렸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젊음을 위해 꾸준히 한다는 ‘성형’, 그리고 자신의 전 남편 브루스 윌리스 때문이다. 


데미 무어와 브루스 윌리스는 ‘쿨한’ 할리우드 커플의 대명사였다. 그들은 1987년부터 2000년까지 결혼생활을 지속했고, 세 딸아이를 낳아 길렀다. 헤어졌지만 두 사람은 친구 같은 관계를 유지했고, 각자 재혼 후에도 아이들을 동반해 함께 여행을 가는가 하면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는 좋은 사이를 지속했다. 데미 무어-애쉬튼 커처 부부와 브루스 윌리스가 함께 하는 휴가 컨셉의 화보는 화제가 됐고, 브루스 윌리스와의 결혼생활, 그리고 그의 작품 활동을 기렸던 데미 무어의 연설 영상은 유튜브에서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데미 무어는 브루스 윌리스의 아내였고, 1990년대 가장 뜨거웠던 여배우였다

돌이켜 생각했을 때 놀라운 것은 당시 최고였던 여배우가 십여 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동안 그 인기를 어떻게 그렇게 빨리 연소시킬 수 있었나, 하는 점이다. 데미 무어는 1990년대 중반까지 할리우드에서 가장 많은 출연료를 받는 여배우였다.      


몸값을 기준으로 그 인기를 가늠한다면, 지금의 스칼렛 요한슨이나 제니퍼 로렌스에 비할 수준이다. 아니, 그 반대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스칼렛 요한슨도, 제니퍼 로렌스도, 엄청난 몸값을 제시하며 당당하게 자신의 스타성을 입증할 수 있었던 것은 데미 무어의 선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초로 2천만 달러의 개런티를 챙긴 여배우가 바로 데미 무어였다. 당시 엄청난 화제가 됐던 이 개런티는, 그녀가 1996년도 영화 <스트립티즈(Striptease)>에 출연하며 약속받은 금액이었다. 제목대로 무어는 아이 하나를 키우는 싱글맘이자 스트리퍼로 등장하는데, 대형 스타가 전라로 등장해야 할 판이었던지라 할리우드 안팎에서 말들이 많았다.      

<사랑과 영혼>의 한 장면. ⓒ2022. IMDB All Rights Reserved.

데미 무어라는 배우의 대표작이라 하면 <사랑과 영혼(Ghost)>(1990)을 떠올릴 것이기에 이는 꽤 낯선 이야기로 들릴지 모른다. <사랑과 영혼>의 몰리는 청초하고 순수했으며 아름다웠다. 짧은 커트 머리에도 여성미가 넘쳐흘렀고,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들조차도 그 모습에 반했다. 

이 영화 이전에 무어의 커리어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1980년대 초반부터 활동을 시작해 유명 솝 오페라(soap opera) <제너럴 호스피탈(General Hospital)>이나 조엘 슈마허의 <세인트 엘모의 열정(St.Elmo’s Fire)> 같은 청춘영화에 출연해 스타가 되기를 꿈꾸었지만 녹록치 않았다. 오히려 무어는 스캔들로 할리우드에 서서히 이름을 알렸다. 록스타 프레디 무어와 첫 결혼 후 ‘무어(Moore)’라는 성을 물려받았고, <세인트 엘모의 열정>에 함께 출연했던 인기스타 에밀리오 에스테베즈와 연인관계가 됐지만, 브루스 윌리스와 결혼했다. 그때가 1987년이었다. 브루스 윌리스가 <블루문 특급(Moonlight)>으로 스타가 됐을 시기여서 이 결혼은 데미 무어의 이름을 더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탈주(We’re No Angels)> 같은 영화에서 로버트 드 니로, 숀 펜 사이에 들러리 여주인공으로 등장했고, 주연작 <세븐 사인(Seventh Sign)>은 흥행에 참패했다. 잘 나가는 남자들과의 스캔들로 명성은 얻었지만 배우로서의 능력치는 여전히 기대 이하였다.     


이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영화가 <사랑과 영혼>이었다. <사랑과 영혼>은 <에어플레인!(Airplane!)> 등의 코미디 연출에 능했던 제리 주커가 감독한 작품이다. 로맨스의 외피에 스릴러를 심어놓은 흥미로운 장르영화로, 미셸 파이퍼, 지나 데이비스, 앤디 맥도웰 등 당시 내로라하는 유명 여배우들이 출연자 목록에 이름을 올렸지만 이들이 거절함에 따라 데미 무어에게까지 그 기회가 돌아갔다. 이 영화는 박스오피스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아카데미 각본상과 여우조연상(우피 골드버그)을 수상하며 호평받았다. 데미 무어는 생애 처음으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 후보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1990년이 의미 있었다면 그건 줄리아 로버츠의 <귀여운 여인>, 그리고 데미 무어의 <사랑과 영혼> 때문이었다(물론 여주인공의 연기력도 주목받았던 <귀여운 여인>에 비해 <사랑과 영혼>은 그 초점이 데미 무어가 아닌 우피 골드버그에 돌아갔지만).     

<난폭한 주말> <사랑의 기쁨> <은밀한 유혹> (아래) <폭로> <어퓨굿맨> <위험한 상상> ⓒ2022. IMDB All Rights Reserved.

무어는 <사랑과 영혼> 이후 탄탄대로를 걸을 것으로 보였지만 결과를 놓고 봤을 때 그녀의 작품 선택력은 형편없었다. 게다가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아니었고, 개성이 넘치는 배우도 아니었다. 체비 체이스의 코미디 <난폭한 주말(Nothing but Trouble)>(1991), <사랑의 기쁨(The Butcher’s Wife)>(1991), 그리고 스릴러 <위험한 상상(Mortal Thoughts)>(1991)은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참패한 영화들이다. 이 작품들은 그녀의 스타성을 높여줄 영화들도 아니었고, 재미있어 보이는 영화들도 아니었다. 겨우 로브 라이너의 <어 퓨 굿맨(A Few Good Man)>(1992)에 출연해 톰 크루즈, 잭 니콜슨 같은 배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체면치레를 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에드리안 라인의 에로틱 스릴러 <은밀한 유혹(Indecent Proposal)>(1993)과 <폭로(Disclosure)>(1994)는 혹평받았다. 무려 로버트 레드포드, 마이클 더글라스 등과 호흡을 맞추어 흥행에서는 성공할 수 있었지만, 이 영화들에서 무어가 보여준 연기력, 그녀의 작품 선택력은 평론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1995년, 데미 무어는 롤랑 조페의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에 출연해 시대극에서의 변신을 꾀했지만 흥행과 평단으로부터 외면당했다. 멜라니 그리피스, 로지 오도넬이 함께한 여성 영화 <나우 앤 덴(Now and Then)>이 큰 이슈가 될 리는 만무했고, 알렉 볼드윈과 함께 한 스릴러 <주어러(The Juror)>는 다시 한번 흥행에 참패했다. 그러니까 <사랑과 영혼> 이후 약 6년 사이에 출연한 영화들 중 <어 퓨 굿맨>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영화가 흥행, 비평 양면에서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은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미 무어는 높은 개런티를 챙겼다. <스트립티즈>는 모험 같은 영화였다. 이렇다 할 흥행을 만들어내지 못한 무어는 이슈의 꼭대기에서 줄타기를 하는 꼴이었다. 엔간한 남성 배우들만큼의 돈을 받았으니 그 값은 제대로 해야 할 터였다. 당시 모든 잡지들이 이 영화를 대서특필했다. 무어는 임신 당시 자신의 누드 사진을 ‘베니티 페어(Vanity Fair)’ 표지에 실은 전력도 있었으니 노출이 놀랍진 않았다. 무어가 전신 성형을 했다는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몸매 보완이 필요했기에 얼굴과 전신을 고쳤다는 소식도 들렸다. 실제 스트리퍼를 만나 노하우 등을 전수받았다는, 단골 메뉴 같은 홍보 기사도 나왔다. 무어는 영화 홍보를 위해 TV쇼에 나가 스트립쇼를 펼쳤다. 자극적인 NC-17등급에 빛났던 폴 버호벤의 <쇼걸(Showgirls)>은 <스트립티즈>보다 8개월 앞서 개봉해 흥행에 참패한 바 있었다. 2천만 달러의 거액을 받은 데미 무어는 이 영화가 망하면 함께 무너질 것으로 예측됐다.  

<스트립티즈> (우) <지.아이.제인>. ⓒ2022. IMDB All Rights Reserved.

모두가 그렇게나 우려한 대로 <스트립티즈>는 망했다. 

지금은 기억조차 못하는 이 영화는 <쇼걸>보다 낮은 평가에 저조한 수익을 기록했다. 데미 무어는 2천만 달러의 개런티를 챙겼고, 이후 리들리 스콧의 액션 <지.아이.제인(G.I. Jane)>에도 출연했지만 더이상 승승장구할 수는 없었다. 짧은 머리일 때만 흥행에 성공했다는 말도 안 될 징크스까지 갖다 붙여 <지.아이.제인>은 성공할 수도 있다는 기대가 있었지만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음에도 흥행에는 실패했다. 셰어, 시시 스페이섹과 함께 출연한 <더 월(If These Walls Could Talk)>로 다시 한번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거기까지였다. 우디 알렌의 <해리 해체하기(Destructing Harry)>, <패션 오브 마인드(Passion of Mind)>를 끝으로 1990년대 활동은 마무리가 됐다. 다시 한번 전신 성형으로 스크린에 나타나 이슈가 됐던 것이 <미녀삼총사2(Charlie’s Angels: Full Throttle)>(2003)의 출연이며, 당시 애쉬튼 커처와의 열애 등이 화제가 되어 제2의 전성시대가 열리는가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과거 명성을 되찾지 못했다.      


무어의 전성기가 채 10년을 가지 못한 것은 부족한 연기력, 형편없는 작품 선택력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미 무어는 1990년대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배우이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자신을 훌륭하게 홍보할 줄 알았다. 우선 첫 남편 프레디 무어의 말처럼 남자들의 명성을 이용할 줄 알았다. 에밀리오 에스테베즈, 두 번째 남편 브루스 윌리스 등 당시에는 자신보다 이름난 배우들이었고, 애쉬튼 커처와 결혼할 때 무어는 전성기가 지나있었다. 꺼려지는 캐릭터에 도전하는 것도 거리낌이 없었다. 스트리퍼로, 그리고 머리를 빡빡 민 여군으로, 이슈가 될 만한 영화를 선택했고, 당당히 최고액의 개런티를 받아냈다. 화제가 된다면 TV 토크쇼에서 스트립쇼를 펼치고, 임신한 몸으로 누드사진을 찍어 잡지 표지에 싣는 것조차 개의치 않았다. 데미 무어는 그야말로 자신의 스타성을 높이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과감함을 실천한 여배우였다. 처음으로 2천만 달러의 출연료를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엔간한 남자배우들보다 두둑한 배짱 때문이었을 것이다(이즈음 데미 무어의 개런티는 브루스 윌리스를 앞질렀다).     


현 시대에 잘 나가는 할리우드 배우 커플들은 많지만, 데미 무어와 브루스 윌리스만큼 인상적이진 않아 보인다. 이들이 헤어질 당시, 추문은 따로 없었다. 서로 잘 살길 빈다는, 쿨한 입장으로 세 딸을 사이에 두고 헤어졌다. 그래서인지 각자 다른 배우자를 만나고 헤어지는 오랜 세월을 지나왔음에도 친구 같은 관계를 유지했고, 그마저도 ‘할리우드의 매력’으로 만드는 놀라운 스타성을 발휘했다.      


데미 무어는 자유분방하고 풍요롭지만 혁신의 시기로 접어들던 1990년대의 여배우였다. 60대로 접어든 그녀의 모습이 어떻든 90년대에 박제된 그 시절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은 여전히 큰 즐거움이다.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블루문 특급>에 특별출연했을 당시 데미 무어(좌)의 모습. ⓒ2022. IMDB All Rights Reserved.
작가의 이전글 할리우드의 가치, 그리고 톰 크루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