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미셸 파이퍼 Michelle Pfeiffer
지금도 미셸 파이퍼만큼 묘한 매력을 가진 아름다운 얼굴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완벽한 황금비율을 자랑했던 얼굴인 만큼(당시 기사를 통해 이슈가 된 바 있다) 시간이 지나도 그 아름다움은 비교불가로 남아있다.
1958년생인 미셸 파이퍼는 미스 오렌지 카운티로 선발된 뒤 할리우드에 입성했다. 미인대회 수상자라서 자동적으로 꽃길을 걸은 게 아니라 차고 넘치는 미인들 속에서 식당 웨이트리스 생활을 하며 배역 오디션을 보러 다녔고, 1979년부터 TV 드라마에 캐스팅되는 것으로 연기생활을 시작했다.
싱거운 코미디 영화에 출연하며 스크린을 넘나들던 그녀는 <그리스(Grease)> 속편(1982)의 여주인공으로 출연했고, 이후 브라이언 드 팔마의 <스카페이스(Scarface)>(1983)에 출연하며 인지도를 높였다. <밤의 미녀(Into the Night)>, <레이디호크(Ladyhawke)>, <이스트윅의 마녀들 (The Witches of Eastwick)>, <마피아의 아내(Married to the Mob)> 등에 출연했고, <데킬라 선라이즈(Tequila Sunrise)>, <위험한 관계(Dangerous Liaisons)>, <사랑의 행로(The Fabulous Baker Boys)>로 커리어는 서서히 상승곡선을 그렸다.
출연작들을 보면 그 면면이 남성 중심의 영화들에서 배경에만 머물렀던 여배우들과 달랐다. 위험한 자들로부터 도망치는 모델(<밤의 미녀>)이나 남편의 죽음 이후 모험을 감행하는 갱스터의 아내(<마피아의 아내>) 등 타 여배우들에 비해서도 능동적인 캐릭터로 영화에 등장했다. 이즈음 파이퍼는 30대 초반에 접어들고 있었다. 같은 배우였던 피터 호튼과 이혼했고, <위험한 관계>를 촬영하며 만났던 존 말코비치와 불꽃 같은 연애를 했지만 작업 종료 후 말코비치는 매정하게 다른 여성과 결혼해버렸다. 사적으로는 불쾌한 경험이었지만, 파이퍼는 <위험한 관계>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며 연기력을 인정받는 배우 대열에 합류했다. 이듬해 <사랑의 행로>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2년 연속 오스카상 후보’라는 기염을 토하면서 소위 ‘잘 나가는 여배우’ 가 됐다(골든글로브에서는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렇게 그녀의 1990년대는 기대감을 품기에 충분했다.
프랭키와 쟈니 (Frankie and Johnny)(1991)
배트맨2 (Batman Returns)(1992)
러브필드 (Love Field)(1992)
순수의 시대 (The Age of Innocence)(1993)
울프 (Wolf)(1994)
위험한 아이들 (Dangerous Minds)(1995)
업 클로즈 앤 퍼스널 (Up Close and Personal)(1996)
<프랭키와 쟈니>는 <스카페이스> 이후 알 파치노와 오랜만에 호흡을 맞춘 영화였다. <귀여운 여인>으로 성공을 거둔 게리 마샬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였고, 스튜디오는 이 점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하지만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고, 두 배우의 커리어에 큰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이 때는 알 파치노도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기 직전이었다). 그럼에도 <스카페이스>를 좋아했고, 두 배우를 좋아한 영화팬들은 이 영화를 두고두고 인상적인 로맨스 영화로 회자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파이퍼는 재키 케네디를 추종하는 평범한 미용사로 등장한다. 아이를 유산한 로렌 하레트(미셸 파이퍼 분)는 케네디가 암살당하자 재키 케네디에게 감정을 이입해서 홀로 워싱턴으로 여행을 떠나는데, 그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 흑인 부녀와 일련의 일을 겪으며 깨달음을 얻는다. 살짝 백치미를 풍기는 이 로렌 하레트라는 캐릭터는 미셸 파이퍼에게 썩 잘 어울리는 배역이었다. 그녀는 열연을 펼쳐 세 번째 아카데미에 도전했지만, 그 해 영광은 <하워즈엔드(Howard’s End)>의 엠마 톰슨에게 돌아갔다. 이때 미셸 파이퍼가 트로피를 가져갔다면 <스카페이스>, <프랭키와 쟈니>로 호흡을 함께 맞췄던 알 파치노와 나란히 영광을 가져가는 셈이 됐을 텐데(알 파치노는 <여인의 향기>로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그런 행운은 파이퍼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미셸 파이퍼에게 마지막 아카데미 후보 지명이었다.
<순수의 시대>에서 미셸 파이퍼는 빛났다. 그녀는 숨막히는 귀족사회에서 우아하게 살아가는 이혼녀로, 남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불행한 여성 엘렌 올레스카를 연기했다. 그녀 사촌의 약혼자와 사랑에 빠지고 영원한 사랑을 꿈꾸지만 그 꿈을 이루기에 19세기 뉴욕 상류사회는 녹록치 않다. 미셸 파이퍼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자유로운 여성을 매력적으로 연기했다. 정숙한 약혼녀와 정반대의 캐릭터로, 위노나 라이더와 완전히 다른 아름다움을 드러낸 미셸 파이퍼는 원숙한 연기력을 선보였다. 하지만 위노나 라이더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지명되고 골든글로브 트로피까지 가져갔음에도 파이퍼는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 후보 지명 외에 이렇다 할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당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는 <5번가의 폴 포이티어(Six Degrees of Separation)>의 스토커드 채닝이나 <셰도우랜즈(Shadowlands)>의 데브라 윙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작품성이나 연기력 등을 비교하는 건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평가지만, <순수의 시대>로 미셸 파이퍼가 후보에 오르지 못한 것은 당시 비평가들이나 관객들에게, 그리고 시간이 지난 지금 영화를 보는 우리들에게도 아쉽게 느껴진다.
아카데미상과 인연이 없었던 미셸 파이퍼는 박스오피스에서 만큼은 두 편의 영화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배트맨2>와 <울프>는 (모든 영화들이 그러하지만) 흥행을 위해 기획된 작품들이었다. 이미 성공을 거둔 팀 버튼의 <배트맨> 속편, <배트맨2>는 1편의 조커, 비키 베일의 명성을 잇기 위해 그에 걸맞는 악당과 파트너 캐릭터가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펭귄, 맥스 슈렉, 그리고 캣우먼/셀리나 카일이었다. 펭귄 역은 당시 잘 나가던 배우 겸 감독 대니 드 비토가, 하나 더 추가된 악역 맥스 슈렉은 크리스토퍼 월켄이 맡았다. 그리고 배트맨이 상대할 여성 캐릭터로 캣우먼이 선정되면서 이를 연기할 배우가 누가 될지 관심도 컸다. 가장 먼저 선택된 것은 아네트 베닝이었다. 우아한 외모와 뛰어난 연기력을 가졌던 그녀는 워렌 비티의 <벅시(Bugsy)>로 스타 반열에 올랐다. 날씬한 몸매에 중저음의 목소리가 매력적이었던 그녀는 섹시한 캣우먼에 적역이었다. 하지만 이 캐릭터는 결국 미셸 파이퍼에게 돌아갔는데, 그 이유는 아네트 베닝의 ‘임신’이었다(워렌 비티와 결혼해 낳아 기른 아이가 무려 넷이다).
이후 할리 베리가 말도 안 될 졸작 <캣우먼(Catwoman)>에서 섹시함만 강조한 멍청한 ‘캣우먼’을 연기하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 라이즈(The Dark Knight Rises)>에서 앤 헤더웨이가 캣우먼을 영민하게 연기하기도 했지만, 둘 다 미셸 파이퍼의 캐릭터에는 미치지 못할 수준이었다(팀 버튼의 캐릭터들은 이후 나온 <배트맨> 시리즈 어디에 갖다 붙여도 상대적으로 뛰어났다고 생각한다. 훌륭하다고 극찬받는 히스 레저의 ‘조커’에 비해 잭 니콜슨의 캐릭터가 갖는 탁월함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외모와 연기력 모두에서 역대급 캐릭터를 창조해냈고, 그 캐릭터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놀랄 정도의 세련됨을 유지하고 있다.
CG 기술이 극도로 발달한 오늘날 영화화가 된다면 오히려 재미없을 영화 <울프>는 잭 니콜슨과 미셸 파이퍼가 공동으로 주연을 맡았지만, 실상 잭 니콜슨의 매력과 연기력에 기댄 작품이었다. 잭 니콜슨이 늑대인간으로 출연했기 때문이다. 미셸 파이퍼는 그 늑대인간이 된 잭 니콜슨, 악역 제임스 스페이더 사이에서 매력을 뽐내는 여성 캐릭터로, 상대적으로 덜 흥미로운 인물로 등장했다. 거장 마이크 니콜스가 메가폰을 잡고 여름 시즌에 개봉한 호러영화였기 때문에 박스오피스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미셸 파이퍼는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이듬해 개봉한 <위험한 아이들>은 미셸 파이퍼가 원톱 주연을 맡은 작품이었다. 시드니 포이티어의 <언제나 마음은 태양(To Sir, With Love)>을 90년대 갱스터 감성(?)으로 그려낸 영화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선생님은 백인 여성이 되었고, 학생들은 거친 유색인종 10대들로 바뀌었다. 이 작품은 2천 3백만 달러의 예산으로 전 세계 1억 8천만 달러의 수익을 거두며 흥행에 성공했다. 미셸 파이퍼로서는 홀로 나선 영화로 거둔 최고 수익일 것이다. 영화의 만듦새는 썩 나쁘지 않은 수준으로, 이런 류의 영화에 기대할 수 있는 적정치의 갈등과 감동을 준다는 점에서 큰 특징은 없었다. 다만, 쿨리오의 주제곡 ‘갱스터즈 패러다이스(Gangsta’s Paradise)’는 엄청난 히트를 쳤다.
미셸 파이퍼는 1993년, 작가 겸 영화제작자 데이비드 E.켈리와 결혼했다. 그는 <앨리 맥빌(Ally McBeal)>과 <프랙티스(The Practice)> 등의 TV 시리즈로 유명한 인물이다. 슬하에 두 자녀를 낳아 키우면서도 미셸 파이퍼는 꾸준히 작품활동을 펼쳤다. <위험한 아이들> 이후 그녀는 <업 클로즈 앤 퍼스널>에 출연했다. 이 영화는 ‘로버트 레드포드와 미셸 파이퍼 주연의 로맨스 영화’라고 한다면 상상할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장르영화로, 박스오피스에서는 그럭저럭 흥행했지만 호평을 얻는데에는 실패했다.
이후 조지 클루니와 <어느 멋진 날(One Fine Day)> 같은 로맨틱 코미디에도 출연했고, 제시카 랭, 제니퍼 제이슨 리 등과 묵직한 드라마 <1000에이커(A Thousand Acres)>에도 출연했지만 비평이나 흥행 면에서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2000년대로 접어들기 직전까지 <스토리 오브 어스(The Story of Us)>, <한여름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 등에 출연했고, <왓 라이즈 비니스(What Lies Beneath)>와 <아이 엠 샘(I Am Sam)> 이후에는 한동안 작품활동이 없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남편 내조와 아이들 키우기에 전념했다고도 했다. <헤어스프레이(Hairspray)>나 <스타더스트(Stardust)>로 스크린에 돌아왔을 때 그녀의 모습은 예전과 다소 달라져 있었다. 40대 중후반으로 접어든 만큼 외모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셸 파이퍼는 이제 <앤트맨> 같은 마블 영화나 <마더!(Mother!)>, <오리엔트 살인사건(Murder on the Orient Express)> 등 이슈가 된 작품들에서 나이 든 노년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시간이 많이 흘렀기에 자연스러운 결과이지만, 90년대의 강렬했던 모습들을 씁쓸히 떠올려보게 된다. 전성기가 영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조금 더 돋보일 수 있었던 여배우였음을, 그녀의 신작들을 보며 오늘도 아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