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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 멀리 반짝이는 별 Aug 21. 2022

슈퍼맨이 되고 싶었던 패밀리맨

05. 니콜라스 케이지 Nicolas Cage

10년 전 새러데이 나이트 라이브(Saturday Night Live)에 니콜라스 케이지가 출연했다. 앤디 샘버그가 연기한 ‘짝퉁’ 니콜라스 케이지 때문이었다. 그날 쇼의 호스트(host)도 아니고 한 에피소드에 잠깐 출연했는데, 자신을 희화화하는 데에 대한 항변이라도 있을 줄 알았지만 그가 한 일이라곤 무표정한 얼굴로 스스로를 조롱하는 것뿐이었다. 

새러데이 나이트 라이브(2012)의 한 장면. 니콜라스 케이지는 자신을 희화화시킨 앤디 샘버그와 함께 쇼에 출연했다.

니콜라스 케이지의 팬이었던 사람으로, 이 영상은 충격적이었다. 웃자고 만든 코미디쇼에 화를 낼 필요는 없지만, 좋아했던 배우가 조롱거리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냥 슬픈 정도가 아니라 몹시 슬펐다. 이렇게라도 해야 미국 최고의 TV쇼에 등장할 수 있다니,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되었나, 참담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니콜라스 케이지는 과장된 표정이 담긴 밈(meme)들이 인기를 끌면서 다시 한번 조롱과 희화화의 대상이 되었다. 이혼을 했고, 회계사가 문제를 일으켜 파산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2000년대 말부터 내리막을 걷기 시작한 커리어는 2010년대가 되면서 B급 영화 출연으로 굳어졌다. 


지금은 B급 영화, 저예산 영화들에 출연하며 다작하는 처지로 추락했지만, 1990년대 니콜라스 케이지는 누구보다도 반짝였고 훌륭했다. 어떤 역할이 주어지든 연기력이 뒷받침되어서인지 전성기는 10년 이상 이어졌다. 그렇게 나온 대표작들이 <더 록(The Rock)>, <페이스 오프(Face/Off)>, <내셔널 트레져(National Treasure)>, <식스티 세컨즈(Gone in 60 Seconds)> 등이다.  

니콜라스 케이지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과 명성을 동시에 안겨준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 2022. IMDB All Rights Reserved.

니콜라스 케이지는 1995년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Leaving Las Vegas)>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30대 초반으로, 이전까지는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조카이자 <버디(Birdy)>, <문스트럭(Moonstruck)>, <광란의 사랑(Wild at Heart)> 같은 작품성에 치우친 영화들에 출연하는 연기 ‘잘하려는’ 배우로 알려져 있었다. 그도 할리우드 배우로 명성을 얻기 위해  <탑건>의 짝퉁 같은 액션영화 <아파치(Fire Birds)>나 코미디 영화 <허니문 인 베가스(Honeymoon in Vegas)>, 로맨틱 코미디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It Could Happen to You)> 등에 출연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여태 출연해왔던 영화들과 결이 비슷하면서도 가장 잘 할 수 있는 류의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선택해 최상의 결과를 얻어냈다. 이즈음 숀 코너리와 함께 마이클 베이의 액션 블록버스터 <더 록> 에 캐스팅됐고, 이듬해에는 <콘에어(Con Air)>와 <페이스 오프>에 연이어 출연했다. 세 영화 모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고 흥행에 성공했다. 니콜라스 케이지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의 영광을 안고 그야말로 주류 영화에 완전히 편입되는 데에 성공했다. 


이후 니콜라스 케이지가 흥행시킨 영화들은 브래드 실버링의 <시티 오브 엔젤(City of Angels)>, 조엘 슈마허의 <8미리(8mm)>, <식스티 세컨즈>, <패밀리맨(The Family Man)>, <내셔널 트래져> 등이다. 꾸준히 흥행하는 영화들에 출연하면서 자신의 입지도 제대로 굳혔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정체성에 대한 비난도 있었다. 이를테면, 니콜라스 케이지의 절친이었던 숀 펜은 1999년 한 인터뷰에서 “니콜라스 케이지는 더이상 배우가 아니다. 단순 연기자 쪽에 더 가깝다.(Nic Cage is no longer an actor. He’s more like a performer).”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안타까움이었는지, 아니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그보다 더 빨리 받은 데에 대한 시샘이었는지 모르지만(당시 숀 펜은 깐느, 베니스, 베를린 등 세계 3대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석권한 상태였다) 니콜라스 케이지에 대한 평가는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예전처럼 소규모의 작품성 있는 영화들에 출연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의 높아진 위상을 과시할 수 있는 영화들을 택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예전보다 훨씬 높은 출연료를 요구했다. <비상근무> 같은 소규모 영화에서도 1천만 달러의 개런티를 챙겼고, <식스티 세컨즈>, <윈드토커(Windtalkers)> 등의 영화로 무려 2천만 달러의 출연료를 받았다. <더 록>에서 그의 개런티가 4백만 달러였던 점을 상기한다면 몸값이 어마어마하게 높아졌던 셈이다. 작품보다 돈을 좆는다는 세간의 평가를 의식해서였는지 니콜라스 케이지는 2002년 스파이크 존즈의 <어댑테이션(Adaptation)>에서 다시 한번 호연을 펼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마음만 먹으면 예전처럼 연기할 수 있다는, 뭐 그런 걸 보여준 사례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 

1990년대 니콜라스 케이지의 명성을 반증하는 세 영화 <더 록><콘에어><페이스오프>. ⓒ 2022. IMDB All Rights Reserved.

그가 가십거리가 되기 시작한 건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였다. 1999년 말 당시 아내였던 패트리샤 아퀘트와 이혼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흘러나왔다. 두 사람이 함께 출연한 마틴 스콜세지의 <비상근무(Bringing Out the Dead)>가 개봉된 시점이기도 해서 분위기는 미묘했다. 한술 더 떠서 케이지가 외로움 속에 혼자 집에서 술을 마시며 슈퍼맨 수트를 입고 자기가 슈퍼맨이라 떠들며 논다거나 벌어들인 돈을 희귀한 만화책 사모으는데에 탕진한다는 뉴스까지 나돌았다.


이즈음 니콜라스 케이지가 집착한 대상은 슈퍼맨과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데이빗 린치의 <광란의 사랑(Wild at Heart)>에 출연할 당시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를 불러제끼는 캐릭터를 연기해서였는지 그 스스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광팬이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었다. 그래서 니콜라스 케이지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2002년 결혼식을 올렸고, 2년도 채 되지 않아 파경을 맞았다. 이렇게 끝난 결혼생활에 대해 케이지는 “결혼 자체가 실수”였다는 황당한 말을 남겼다. <슈퍼맨>과 관련해서는 니콜라스 케이지가 운이 없었다는 말밖엔 할 수 없다. 당시 기사에 대한 기억은, 니콜라스 케이지가 <슈퍼맨> 제작을 위한 판권을 사들였고, 리부팅을 위한 작업을 진행했는데, 어떤 이유였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최종적으로 영화 출연이 무산됐다. 그리고 브라이언 싱어가 감독을 맡고 신인 배우를 캐스팅하여 <슈퍼맨 리턴즈(Superman Returns)>가 완성됐다.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한 것으로 보도됐는데, 박스오피스 수위를 차지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음에도 니콜라스 케이지 출연을 위한 영화 개발비용까지 합산된 제작비가 2억 7천만 달러에 육박해 BEP를 맞추지 못한 셈이 됐다. 


솔직히 영화를 즐겨봤던 사람들(특히 남자관객)이라면 <더 록>이나 <콘에어>, <페이스 오프>는 모두 재미있게 봤을 것이다. 나 역시도 이 영화들을 십수번씩 관람했고,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을 즐겨 들었으며 영화 포스터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버스에 붙은 영화 광고판을 보며 흥분했던 기억도 난다. 돌이켜보면 참 행복했던 추억인데, 지금은 그 같은 즐거움을 느낄 수도 없어서 아쉽기도 하다. 어쨌거나 변화된 미디어 환경에 빠르게 적응해야 하는 게 영화판이니. 

영화 <패밀리맨>의 포스터. ⓒ 2022. IMDB All Rights Reserved.

결정적 순간패밀리맨 Family Man

<패밀리맨>은 1990년대 영화가 아니다. 한참 세기말 분위기에 어수선했던 1999년을 지나 2000년에 개봉한 영화로, 크리스마스 시즌을 겨냥한 가족영화였다. 나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팬이었지만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 수능시험이 끝난 시점에 가볍게 이 영화를 볼 법도 했지만, 감독이 브랫 래트너였고, 니콜라스 케이지에 대한 흥미도 조금은 떨어진 상태였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이 영화 <패밀리맨>을 관람했다. 최근에 <맨디(Mandy)>나 <피그(Pig)> 같은 영화로 연기력을 다시금 확인시켜준 그였지만, 그 옛날의 명성을 되찾기에는 한참 먼 것 같았다. 그런 소식들을 접하던 차에 1990년대, 정말 내가 좋아했던 그 모습 그대로로 살아있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모습을 <패밀리맨>에서 확인했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성공한 회사 중역으로, 다소 비인간적인 듯 보이는 남자 잭 캠벨이 자신이 과거 사랑했던 여인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평범한 남자의 삶을 경험하게 되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는 내용의 드라마다. 90년대에 잘 나갔던 여배우 테아 레오니와 함께 출연한 영화인데 닳고 닳은, 흔해 빠진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막상 작품을 보면 재밌고 지금 영화들에서 볼 수 없는 따스함도 느낄 수 있다. <러시아워(Rush Hour)>시리즈로 성공을 거두고 훗날 <엑스맨3 (X-Men3: The Last Stand)>를 말아먹은 장본인 브랫 레트너가 그래도 이야기꾼임을 증명해낸 영화이기도 하다. 대니 엘프만의 음악 스코어도 훌륭하다. 


무엇보다도 니콜라스 케이지의 준수한 모습을 보며 그 시절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점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를 왜 여태 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니콜라스 케이지의 출연작들 중에서도 썩 괜찮다는 평가를 내릴만한 영화라고나 할까.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에서처럼 말랑말랑한 모습을 보여주기 떄문에 꽤 만족스러운 영화이다.     


시간이 흘러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 그 이미지가 때론 퇴색되기도 하고 잊혀지기도 하는 게 유명인이라지만, 니콜라스 케이지는 뛰어난 연기재능과 매력을 가지고 있었던 배우로 지금은 많이 무너진 것 같아 안타까운 이들 중 한 사람이다. 최근에 다시 커리어가 오름세로 돌아서긴 했지만 과거의 명성을 찾기에는 한참 역부족이다. 그럼에도, 배우란 모름지기 연기로 자신을 드러내야 하기에 그의 뛰어난 연기력이 부활했다는 소식은 여러모로 좋은 신호라는 생각이 든다.      


니콜라스 케이지를 정말 많이 좋아했다.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이지만, 1990년대의 행복한 영화들 속에 그의 젊은 시절 멋진 모습이 오롯이 남아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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