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X 관련 발표 중 기억에 남는 몇 가지
1. 원티드랩 UX 부문장인 이신혜 디자이너는 라인 재직 시 전사 디자인 시스템을 만든 경험이 있다. 완성도가 매우 높아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된 것으로 알고 있고, 나도 그 덕분에 이신혜 디자이너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디자인 시스템을 적용하려고 할 때, 개발자들을 설득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오늘 발표 내용의 대부분은 ‘설득 잘 하는 법’이었다.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 끝이 아니고, 이를 동료들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 또 직함에 따라 어떤 포인트로 설득해야 하는지를 발표했다. 소주제는 ‘메시지 디자인’, ‘회의 디자인’이었다. UI 완성도가 뛰어난 그조차 이러한 전략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놀랐고, 더불어 그 전략이 매우 탄탄하다는 점에 두 번 놀랐다.
2. 축구 게임 FIFA로 유명한 EA 스포츠의 한국 지사, EA 코리아. 발표자는 Head of Design인 이해진 디자이너. EA 코리아에는 게임 디자이너와 UI 아티스트가 근무한다. 게임 디자이너는 게임 규칙이나 보상 시스템을 설계하는 일을, UI 아티스트는 심미성과 몰입도 높은 게임 환경을 만드는 일을 한다. ‘UI’ 뒤에 ‘아티스트’가 붙는 것도, ‘디자이너’가 시각적 요소를 다루지 않는 순수 ‘설계’ 일을 한다는 점도 신기했다. 요즘 ‘UI/UX/프로덕트 디자이너’라고 모두 묶어 부르는 것에 비해 책임과 역할이 훨씬 또렷한 느낌이 들었다.
몇 년 전부터 두 직군 사이에 업무 공백이 생겨 ‘UX 디자이너’를 고용하고 해당 직군의 비중을 늘리고 있다고 한다. 정확한 필요에 따라 채용하는 경우라 그런지, ‘UI/UX’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앱/웹 서비스보다 UX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보였다. 그러나 채용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뽑느냐는 질문에 “내 일, 네 일 가리면 업무 공백이 계속 생기기 때문에 가리지 않고 주도적으로 일하는 태도를 본다”고 대답했다. 내가 축구 게임을 좋아했으면 당장 지원했을 듯.
3. 구글, 쿠팡에서 일하다 현재 마이리얼트립 CXO로 있는 조나단 정. 구글에서 쿠팡으로 옮길 때부터 워낙 핫한 인물이어서 기대가 컸는데, 발표는 그 기대를 충족시켰다. 그는 AI를 처음 써보고 너무 신기하고 재밌어 개발자들과 이틀 밤을 새워 여행 계획을 자동으로 짜주는 서비스를 론칭했다. 글로벌한 관심을 받았으나 몇 개월 만에 서비스 종료. 최근에는 자유 여행과 패키지 여행의 장점을 섞은 ‘마이팩’ 서비스를 론칭했다. 이 서비스에도 AI를 많이 썼는데, 이전과 달리 사용자 반응이 좋다고 한다. 그거 만들려고 수많은 여행 상품들을 일일이 분석해서 스프레드 시트에 옮겼다고 한다.
마이리얼트립이 최근 시리즈 F까지 투자 유치에 성공하면서 몸집이 굉장히 커졌는데, 여전히 일부는 초기 스타트업처럼 수작업으로 일하는 듯 했다. Q&A 중 “여행의 재미는 계획 짜는 건데 그걸 AI로 자동화해버리는 것이냐”는 질문이 귀엽고(?) 인상적이었다. 이에 “인기 관광지 비교, 항공권 비교 등 품이 많이 들고 번거로운 작업을 자동화하는 데 신경쓰고 있다”고 답변했다. 프레젠테이션 자료나 발표 내용, 말하는 자세 등에서 프로페셔널한 느낌이 많이 들었다. 무엇보다 든든한 자본 아래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많이 하는 것 같아 좀 부러웠다.
4. 쿠팡에서는 다양성과 UX를 주제로 발표했다. 두 명의 디자인 디렉터, Rannie Teodoro와 Tessa Kim이 한국어와 영어로 함께 진행했다. Rannie가 영어로 말하면 Tessa가 이를 요약해서 번역해주고 이어서 말하는 식이었다. 짧은 문장이나 추임새는 서로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썼고, 두 사람의 재치있는 진행 덕분에 오늘 발표 중 분위기가 가장 화기애애했다.
같은 내용을 한국어와 영어로 거의 두 번씩 말하느라 내용이 풍부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글로벌 기업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조직 문화였고, 이를 간접적으로 체험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쿠팡에서는 회의마다 통역사가 참석하고, 덕분에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중 원하는 언어로 회의할 수 있다고 한다. Q&A 시간에 Rannie에게 언어 때문에 일할 때 어려웠던 점을 물었는데, 그 에피소드가 재밌었다. 쿠팡 이츠에서 일하면서 한국의 음식 분류가 매우 당황스러웠다고.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만 외국인에게는 이상하게 보였던 그 분류는 바로 한식, 중식, 아시안 음식.
5. 네이버와 토스뱅크의 발표는 기대에 비해 아쉬웠다. 네이버는 지금 AI로 진행 중인 실험들을 소개했는데 다소 개인적인 실험들이었고, 토스뱅크는 처음 은행을 만들 때부터 지금까지 론칭한 기능들을 나열하는 데 그쳤다.
6. 작년에 네이버에서 개최한 DAN 23 컨퍼런스도 참석했었는데, 확실히 스케일 면에서는 원티드와 네이버를 비교할 수 없다. DAN 23은 카메라와 기자들도 정말 많았고,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풍성했다. 하지만 현재 내가 하는 일과 유사하고, 그래서 유익하고, 또 즐거웠던 건 원티드 하이파이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