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1. 목. 하얀 할머니
내가 아주 어렸을 때다. 우리 집에는 하얀 할머니가 계셨다. 머리가 하얗다고 해서 하얀 할머니라고 불렀다. 그럼 머리가 까만 할머니도 계셨단 말인가? 그렇다. 우리 집에는 머리가 까만 할머니도 계셨다. 하얀 할머니는 증조할머니다. 아버지의 할머니셨다. 하얀 할머니는 허리도 굽으셨다. 특별히 활동하는 건 없으셨고, 겨울철에는 화롯불에 앉아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는 전래동화가 아니다. 아버지의 어릴 때 이야기가 있었다. 또 동네의 풍습 같은 이야기도 해주셨다.
옛날이야기도 하면서 화롯불에서 고구마나 밤을 구워 먹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물자가 귀해서 많이 먹어보지는 못했다. 할머니는 고구마나 밤을 잘 구우셨다. 그리고 껍질을 까서 나에게 주셨다.
그때 대통령이 이승만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생신 때면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에게 선물을 보내주셨다. 나이가 많은 기준은 이승만 대통령보다 나이가 많거나 같은 노인들이라고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할머니가 받은 선물을 보여주면서 자랑을 하셨다.
그때는 대통령의 생신이나 광복절 같은 국경일에는 ‘꽃 전차’라고 다녔다. 전차에 화려하게 장식을 하고 다녔는데 사람들이 그걸 보려고 길거리로 나왔었다. 당시에는 볼거리가 없었다.
동네에 서커스가 들어오면 사람들이 구경을 갔다. 할머니는 잘 걷지를 못하셔서 구경도 못 하셨다. 그래도 치매도 안 걸리시고 곱게 늙으셨다. 인자하신 하얀 할머니의 웃음이 떠오르는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