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 함께한 혈액암을 영원히 떠나보내며
0. 시작하며 혹은 맺으며
집을 나서 수원터미널로 향하는 버스를 타자마자 눈발이 날린다. 수원시민에게는 올 들어 첫눈이다. 진눈깨비라 칭하기엔 미안할 만큼 눈송이가 꽤나 실해 보인다. 산 속의 절에 들어가기에는 그야말로 적합한 날씨겠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며칠 전 다시 시작된 장 트러블을 가라앉히기 위해 스멕타(설사약)를 하나 뜯는다. 이 정도면, 그리 나쁘지 않은 시작이다.
추운 겨울 충청도 어느 산사에서 투병기를 쓰며 수차례 울었다.
내 안의 과거를 여행하며 마주한 나의 모습은, 보고 있자니 참으로 불쌍하고 마음이 아파, 보듬어 안아주고 등을 쓸어주며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속삭여주고 싶은 여린 아이였다. 쓰러질 법도 한데 너무나 잘 걷고 있어서 그저 네가 최고라고 말해주고 싶은, 대견한 아이였다. 이젠 거의 담담해지지 않았나, 생각했는데 아직이었다.
그리고, 그 어떤 설명 어떤 수식어도 모자랄, 불쌍하고 사랑스러운 나의 어머니!
시간이 더 가기 전에 기억들을 끄집어 낸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대학교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웬만 잊혀졌다 싶으면 안으로부터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나를 봐달라는, 날 다시 꺼내달라는, 그러지 않으면 이대로 썩어버리겠다는. 나의 투병 기억은 오래된 물과 같아, 고여 있으면 썩는 것이라 어서 흘러나가게 하고 싶었다. 기실 기억이란 언젠가 흘러가야만 하는 것이다.
절간에는 하루 종일 나아무아미타아불 소리가 고여 있다. 다른 소리를 하루 종일 들으면 노이로제에 걸릴 터이지만 이 소리는 전혀 거슬리지가 않는다. 물론 이조차도 무균실의 나에게는 속을 뒤집기에 부족함 없는 자극적인 소리였으리라. 새벽 4시에 새벽예불을 시작하는 목탁소리에 잠이 깬다. 재발 소식을 들은 뒤 꿈도 꾸지 않는 밤마다 소스라쳐 깨어날 때와는 사뭇 다른 평온한 기상이다. 나는 지금, 많이 달라져있다.
산사의 눈은 쉬지 않고 내린다. 칠흑 같은 밤을 흰 눈으로 밝히기라도 할 요량이다. 멈추지 않고, 내 안의 소리를 덮고 또 모든 것을 덮을 때까지, 계속 내렸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