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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플 Jun 20. 2023

퇴사 후 한 달

1초가 움직이면 나도 1초만큼 행복하자.

첫 번째 주

 회사를 그만둔 건 금요일이니까 그다음 날 토요일부터 오늘 일요일까지 총 8일간 기상시간은 매일 10시였다. 그렇게 많이 잘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매일매일 10시간을 꼬박 채우고서야 눈을 떴다. 퇴사하면 꼭 하고 싶었던 운동은 하루도 가지 못했다. 시간이 부족했다. 워낙 늦게 시작하는 하루에 헬스장까지 오갈 틈이 없었다. 오전에 겨우겨우 눈을 뜨고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을 먹고 또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을 먹고 또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다가 잠이 들었다.

 주말에서 월요일까지 3일 동안은 시차 적응을 하는 사람처럼 몸에 붙어 있는 속도감을 떨쳐내지 못해 신체적인 느낌이 안정적이지 않았다. 몸은 가만히 있는데 달리고 있는 것과 같이 느껴졌고, 주변 상황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마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몸과 마음이 같은 속도로 갈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다. 천천히 느리게 가는 시간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것에 익숙해질 수 있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화요일부터는 집에 벌여 놓은 온라인 사업을 일으키기 위해서 웹페이지를 꾸며야 해서 자료 찾고 경쟁 사이트 분석하고 온라인 강의도 들었다. 그동안에는 주어진 일만 하다가 이제 내가 나의 일을 찾아 해야 하기에 어디에 기준을 두고 진행해야 하는지 갈팡질팡했다. 갈팡질팡한다는 말에는 확신이 없다는 뜻도 들어 있다. 잘하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어느 순간에 이게 좋다,라고 결정지을 수 있는 나만의 잣대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놓은 일들이 느리게 진척되었다. 느리다고 해서 더 좋은 퀄리티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 텐데 그저 미루어버리고 싶었다. 결정할 수 없으므로 느려진다. 경험이 없으니 거쳐야 할 과정일 테다.


두 번째 주

 친정에서 1박 2일을 보내고 왔다. 엄마랑 친정 오빠가 같이 운영하시는 음식점 가게 일을 의논해야 했고 가게 재계약도 진행되었다. 그리고, 지자체에서 텃밭을 분양받게 되어 텃밭에 가서 땅을 고르고 씨앗을 뿌렸다. 여전히 오전 10시에 일어나는데 그중 하루는 6시 30분에 깨서 아침 운동을 했다. 여전히 몸과 마음이 제자리를 찾았다는 기분은 찾아 오지 않았고 자주 깬다. 퇴사를 축하하는 예전 직장 선후배와의 유쾌한 만남이 있었다. 오랜만에 거주지를 벗어나서 시내로 나가 요즘 유행한다는 음식들을 접하니 새롭고 여유가 있었다. 저녁에는 헬스를 다녔다. 그리고, 마침 벚꽃이 피고 지는 시기라서 벚꽃 구경을 다녔다. 가족들과 함께 여유롭게 벚꽃길을 걸으며 길거리 간식을 사 먹는 기쁨이 대단했다.


세 번째 주

 봄이 깊어졌다. 겨울의 두꺼운 옷들을 빨아 널고 햇살 아래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서늘한 날보다 따뜻하여 얇은 옷으로도 거리를 다닐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상품 페이지를 만들어 새로운 웹스토어를 오픈했다. 그리고, 또 다른 선후배와의 만남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것도 반가웠고 잘 지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도 좋았다. 꼭 만나보고 싶었던 지인과의 식사 시간이었다. 마음을 터 놓고 이야기하는 것, 가감 없이 묻는 것, 눈치 보지 않고 대답하는 것. 모두 즐거운 일이다. 텃밭에 두 번째 방문하여 비료를 주었다. 서둘러 가는 것보다 나를 압박하는 초조함에 여유를 주기로 했다.

 점차 내 마음이 시간의 흐름에 발맞춰 가는 게 느껴진다. 까닭 없이 걱정하거나 미래가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는 세상보다 더 빨리 가려고 노력했었다. 뭐든지 미리미리 하려고 했고, 늦지 않으려고 했고, 기왕이면 빠지지 않으려 했었다. 먹고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해도 좋았다.

 거기에는 나의 경쟁심이 있었다는 걸 이제 알게 되었다. 빨리 가면서 주위를 보면 나보다 더 빠른 사람들이 있었다. 지식이, 재력이, 가족 상황이 나보다 나은 사람들. 너는 이것도 몰라? 라며 나의 무지와 늦음을 탓하는 듯한 느낌. 나는 언제쯤 저 사람들처럼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을까,라고 부러우면서도 조바심이 났다.

 마흔일곱. 지금의 쉼표가 나에게는 꽤나 뜻깊다. 내가 느낀 불행의 원인에 비교 의식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인가.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누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 인 것 같다. 이제 나의 속도가 느려지고 시간을 즐기려고 하다 보니 비교 의식과 질투가 사라졌다. 행복 안에서 살아가려고 한다. 지금의 쉼표를 지키면서, 다른 사람들처럼 내 집마련이나 요리나 살림이나 직장생활을 똑 부러지게 해 나가는 것을 하지 못하는 나를 사랑하면서 살려고 한다.


퇴사 후 한 달

 나는 아주 잘 쉬고 있다. 특별히 힘든 일도 없고 어려운 일도 없이 쉬고 있다. 매일 아홉 시, 열 시에 일어나는 게으른 생활을 반복하다가 오늘은 드디어 도서관에 왔다. 이렇게 게으르다가는 내가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한심함을 기반으로 한다. 하려는 사업에 진척은 더디고, 그래서 답답하기도 한 생활이지만 마음의 평정을 찾기로 했다. 기왕에 쉬는 거 마음 편히나 쉬어 보지 뭐 라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퇴사 후에는 가능한 출퇴근 시간에 이동은 자제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처음으로 아침에 집밖으로 나와보니 학교에 등교하는 친구들의 바쁜 걸음이 종종 대고 서두르는 표정이 보인다. 나는 그냥, 천천히 가는 게 나랑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세상의 속도라는 건 크게 의미 없는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원하는 나만의 속도로 살아야 나다움이 발현되는 듯하다. 1초가 움직이면 나도 1초만큼 행복하자. 행복하자.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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