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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플 Jul 11. 2023

직장이 뭐길래. 첫번째 퇴사

그 누구보다 먼저 나를 용서한다.

 퇴사 4개월차인 나는 요즘, 시간이 너무 많다. 그래서, 예전에 스캔해 두었던 다이어리를 들춰 보기도 하고 벌써 이십년전의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첫번째 퇴사의 기억. 이제는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까마득하지만, 당시에는 절절한 심정으로 퇴사하였던 기록이 있다. 당시 나는 서른 살이었고, 직장 2년차였다.


 To. 나에게


 지난 2년동안 복지관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순간순간 임기응변이 늘고 상사들이 무섭기도 하고 일이 많아서 짜증도 났어. 어, 맞아.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도 참 많이 했어. 그렇지만, 나, 이제 내가 선생이구나, 이 많은 분들에게 도움도 주고 책임이 있는 사람이구나 라는 자부심도 갖게 되었어. 어떻게 생각하면 그냥 남이고, 난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것이지만 사회복지사란 직업은 무척 고귀하기에 무거운 책임감을 갖게 해 주었어.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내팽개친 것이지만, 어쩌면 나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돼. 아직도 사회복지사가 뭐하는 직업인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아까도 얘기 했지만 아직 할 일이 많고 배울 것도 많고 풀어야 할 숙제도 많거든.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떠났으니까 또 다른 여행을 시작해야겠어.

 오늘 성경을 봤는데 요셉 이야기이더라. 알지? 형들이 팔아 버린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 요셉이 형들을 만나고 혼자 울었다는 대목에서 나도 눈물이 나더라. 용서라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 요셉 정도니까 혼자 울고 삭혔지 나라면 당장 화를 냈을 것 같아. 당장, 잘잘못을 가리려고 하겠지. 나라면 말이야. 나라면 말이야. 그래도… 용서하려구. 마음에, 아직 남아 있는 감정들은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 행동과 생각, 의지만이라도 노력하려구. 용서. 용서하려구. 같이 했던 상사들, 동료들, 그리고 미운 오리 새끼였던 나도 말이야.

 그래도 될까? 돈 벌기 위해 시작한 직장 생활에서 남들보다 열심히 해서 총애도 받고 교육도 다니고 사회복지관, 사회복지사란 이름에 울고 일하고 웃고 일하고 결국엔 몸도 안 좋고 길을 잃은 것처럼 헤매고 다녀도 말이야. 우리, 용서하자. 아직 다음 단계로 이행할 진로를 정하지 못해 주저 하고, 재취업이 두려워 원서도 못 넣고 자기소개서 몇줄 쓰는 것도 안되지만 말이야.     -2005 4월 6일. 진의 다이어리에서


 나는 늦은 나이에 사회복지학을 공부하여 취업한 케이스이다. 상담으로 더 공부하고 싶었는데 길이 열리지 않아 취업으로 방향을 돌리면서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십이년을 사회복지사로 일하였다. 인생은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 하였던가. 특별한 사명 의식이 없이 직업으로 다가갔으나 도움이 필요한 분들과 함께 추억을 쌓아가는 즐거움이 쏠쏠했고 보람을 느끼며 계속 일하게 되었다.


 누구나 직업 생활을 유지 하는 데에 큰 뜻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좋아하는 일, 어릴 때부터 꿈꾸던 일을 찾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황에 맞춰 일할 것이다. 부모님이 했던 일을 물려 받을 수도 있고, 친구 따라 같이 취업할 수도 있고, 지인의 권유로 직업을 찾기도 한다. 왜냐하면 제일 큰 문제는 생계를 해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서른이었던 나는 오랜 대학 생활로 학자금 대출이 있었고 경제 상황을 헤쳐 나가려면 취업이 급했다. 특별히 사회복지를 전공했다 뿐 이렇다할 비젼은 없었는데 상담과 사회복지학을 동시 전공했다는 것을 높이 산 관장님의 선택으로 취업을 이룰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신입 딱지를 떼려면 2년 정도는 경력을 쌓아야 한다. 그래야 다음 단계로의 이직이 수월하다. 몇 개월만에 직장을 옮기는 사람은 재취업에서 감점을 받는다. 나는 2년을 치열하게 직장에 다녔고 열심히 일을 배웠다. 그 과정에서 관장님의 논문도 도와 드렸고 주민 분들과 의견 충돌이 일기도 했고 따라서, 상사에게는 숱하게 불려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해프닝에 가까운 일들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쉽게 상심하고 좌절하고 슬퍼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일과 사람, 공적인 나와 개인적인 나 사이에 간격을 조절하지 못해서 우왕좌왕 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용서'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던 것 같다. 첫 사회생활에서 배운 직장 내에 경직된 위계 질서, 실패에 대한 두려움, 익숙해지지 않는 직장인으로서의의 나에 대한 절망이 모두 모여서 상황에 대한 분노가 되었다. 한국사회에서의 직장 문화와 사회 복지 제도의 한계를 떠들어 대며 그 안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나에 대한 실망을 용서해야 했다. 이상은 높고 현실은 낮았다. 확실히 그랬다.


 정말 잊고 싶은 기억은 매주 월요일 업무 정기 회의에 참여 하고 있던 내 모습이다. 채 10명이 되지 않는 복지관 직원들은 둥글게 회의석에 앉아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일주일간 진행할 업무 내용을 공유했다. 별거 없는 일상적인 회의이지만, 같은 인간임에도 서슬 퍼런 관장님께 잔소리 한마디 듣는 게 너무 무서워서 우리는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그때부터 월요병이 생겼고, 직장은 어떤 상황에도 편안하지 않은 곳이라는 것도 배웠다. 그때, 내가 기른 능력은 인내인지도 모르겠다.  무거운 침묵. 낮은 목소리. 경직되고 팽팽한 분위기를 온 몸으로 버티며 일을 잘 하는 것보다는 상황을 견디는 힘을 길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겁다 하며 그 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나와 또래인 2명의 동료 사회복지사와 친절한 선배님, 후배님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나의 선임이었던 과장님의 자유분방함은 관장님도 어찌할 수 없었는데, 그 부분은 우리를 숨쉬게 했다. 예를 들면, 관장님이 주말에 나와서 본인의 논문을 도우라고 하면 담담하게, '저는 선보러 가야 됩니다.'라는 식으로 받아쳤다. 특히, 놀랐던 적이 있는데 예를 들면, 기안서에 날짜가 틀려서 증빙하기 어려운 서류-관장님께 재결재를 받아야 하는-가 생기면 그 날짜 부분만 수정 해야 하는 날짜로 출력한 뒤 오려 붙여서 사용하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새로 프린트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라고 깜짝 놀랐는데 결론적으로는 굳이 전체를 다시 결재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과장님은, 이런 식으로 하면 어차피 증빙이 되니까 괜찮아, 라고 하면서 누가 이런 것까지 따져, 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우리는 이 분을 장군의 딸이라고 별명을 짓고 대담한 그 분의 행적에 존경을 보냈고 한편으로는 위로 받았다.


 감히, 나와 직장을 용서한다는 말을 썼던 것이 지금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표현이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감수성이 예민했고 감정의 진동도 컸다. 나는 사회인으로서의 모습이 준비되지 못한 채로 학생에서 직장인이 되어야 했고 순진하고 원칙적인 삶의 방식을 바꾸어 유연하게 굴복해야 했으며 부조리하다고 보여지는 위계질서에 순응하는 데에 좌충우돌이었다. 어쩌면 그 당시 나에게 용서란,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2년만에 튕겨져 나온 어설픈 반항아였던 나를 향한 '괜찮아. 걱정마.'라는 토닥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지난 동안, '퇴사일기'로 찾아왔었는데요.

 지금 현재의 퇴사 일기는 마무리가 되었지만,

 20년동안 겪었던 과거의 퇴사 일기와 이직에 관한 역사를 '직장의 역사' 에피소드로 엮어볼까 합니다.

 저의 소중한 구독자 열분과 직장생활로 고뇌에 빠지신 여러분들께

 재미있고 즐거운, 처절하고 짠한 직장 이야기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매주 화요일에 뵈요! 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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