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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글이드 Dec 28. 2017

그럴듯한 성취

그럴듯한 2017년을 마무리하며

연말 시즌이 되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한다. 나에게 크리스마스는 겨울 이벤트로 존재해왔다. 그러나 올해 처음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경험했다. 내리쬐는 햇볕에 땀을 흘리며 거리의 캐럴을 들었다. 나에게 ‘크리스마스=겨울’이라는 수식이 더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처럼 2017년의 마지막은 나의 크고 작은 사고가 확장되는 시간이었다.


다시 꺼낸 캐리어

詩식회와 함께 성장한 지난 늦가을. 행사는 성황리에 끝이 났다. 감동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나는 곧바로 짐을 쌌다. 말레이시아의 한 스타트업에서 인턴을 경험하고 오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조건이 걸려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그러나 정량적인 조건 이상의 성장이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무엇보다 미국에서 실패한 목표를 예정 기간 내 다시 달성하는 기회였다.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의 힘으로 끝내 성취한 것에 나는 큰 쾌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 쾌감에 힘입어 한동안 처박혀있던, 조금은 특별한 그 캐리어와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불안한 시작

말레이시아로 떠나기 전날 밤. 마지막 점검을 하던 중,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졌다. 장기 숙박을 예약한 에어비앤비 호스트와 분쟁을 벌이게 되었다. 날린 돈과 남은 분쟁도 문제였지만, 당장 머물 곳이 없어진 막막함에 머리가 아팠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홀로 낯선 나라로 떠난다는 현실이 갑자기 무섭고, 두려웠다. 밤새 숙소를 찾다 임시로 호텔을 며칠 밤 예약했다. 그러나 한 번 나약해진 마음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날밤을 새우고 비행기를 탔다. 비행 내내 이성을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보니, 어느새 말레이시아 땅에 도착해있었다. 이번에는 한참 동안 짐이 나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 다행히 짐을 찾고 나니 또 유심이 문제였다. 공항 안에서 구매한 30일짜리 유심이 사기꾼이 쓰던 유심으로 추정되었다. 몇 분마다 걸려오는 스팸 전화와 사용이 불가할 정도로 날아오는 스팸 메시지에 이어 어플 사용을 위한 인증조차 불가능하였다. 연속으로 터지는 이상한 상황에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더 피할 곳이 없다는 것을 몸이 먼저 느꼈는지 생존 본능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나의 말레이시아 생활은 이렇게 불안하게 시작되었다.


의외의 곳에서 초석 마련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언제나처럼 인복이었다. 직원들과는 친구가 되었고, 한국에서부터 소통해온 한 직원과는 가족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도 적당한 숙소가 나타나지 않았고, 그녀의 가족은 기꺼이 나의 말레이시아 가족이 돼주었다. 집은 회사가 위치한 쿠알라룸푸르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에 있었다. 오래전 생활권이 형성된 곳으로 사소한 불편함이 있었지만, 덕분에 제대로 된 현지 생활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는 말레이시아 생활의 엄청난 획을 그었다. 극도의 불안감을 안겨주던 거주지의 불확실성이 결국 온전한 현지 생활을 경험하게 만들어 주었다. 처음에는 감정 조절이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면 더 좋은 경험을 얻는 초석이 되었다. 모든 상황에 양면이 존재한다는 것을 매 경험을 통해 다시금 깨닫는다. 비록 돈과 감정을 소모했지만, 쉽게 접할 수 없는 경험을 얻었다.


유일한 사람

태어나 한 번도 유일한 무엇이 되어본 적이 없는데, 말레이시아에 와서 이루었다. 사내에서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유일한 사람이 되면 어떤 감정일까 늘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큰 감흥은 없었다.

짧은 기간의 인턴이지만, 업계 특성을 예상한 대로 도착하자마자 바로 실무에 투입되었다. 마케팅팀 소속으로 주로 SNS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했다. 처음 해보는 그래픽 업무에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고통이 수반되었지만, 추후 결과물이 곳곳에 활용되는 것을 보니 보람찼다. 기괴한 그림으로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든 지난해를 떠올리면 큰 발전이다. 한 해 동안 매거진 회사와 시식회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정점을 찍는다. 한 달 동안 수십 개의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했다. 이 외에도 매거진용 콘텐츠와 영상을 만들기도 했다. 또한, 마케팅팀 주도의 큰 행사였던 크리스마스 팝업스토어를 준비 및 진행하는 데 참여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매일 늦은 시간까지 함께 일하며 많은 것을 경험했다. 업무적인 스킬이 보다는 사고의 확장과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업무 분위기는 익숙하면서도 생소했다. 큰 틀에서 보면 일한다는 것은 어디를 가나 비슷하다는 생각이다. 모두가 오랜 시간,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우선순위, 업무방식 그리고 소통의 한계 등으로 크고 작은 일들에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았다. 이러한 감정은 잠자코 있던 다른 요소에도 쉽게 파고들었다. 나는 어리석게 나의 작은 경험을 일반화시키고 있었다. 인제야 깨달음을 얻는다. 같은 생활권에 살아도 서로의 다름에 부딪힌다. 다른 생활권에서 온 내가 느끼는 차이는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어리고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경험을 통해 이렇게 또 하나를 배웠다.


사라진 유일성

팀원들과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대부분 또래여서 쉽게 친구가 됐다. 함께 몸 부딪히며 놀고, 서로의 이야기와 고민을 나누었다. 사람 사는 곳 다 똑같다던 어른들의 말씀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특히 함께 사는 친구는 가족이나 다름 없었다. 그녀의 남자친구까지 포함해 셋은 동네를 헤집고(?) 다녔다. 눈치 없이(?) 커플 사이에 껴있었지만, 이들과 매일 함께하며 현지인 보다 더 현지인 같은 삶을 살 수 있었다. 더이상 외국인이라는 나의 유일성은 존재하지 않아 보였다.

덕분에 말레이시아 전반에 대해서도 배웠다. 한 달 동안 살아온 말레이시아는 굉장히 흥미로웠다. 보수적인 것 같으면서 개방적이고, 서구적인 것 같으면서 동양적이다. 다양한 인종과 종교로 구성된 국가여서 모든 부분에서도 다양성을 띄었다. 대표적으로 말레이, 차이니즈, 인디언 중심으로 문화가 형성되어있고, 그 아래 크고 작은 인종들의 문화가 형성되어있다. 지루할 틈이 없는 곳이다. 매일 새로운 경험과 시야를 얻었다. 특히, 문화에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은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음식의 범주가 굉장히 다양했다. 문화 특성에 따라 여러 나라의 음식이 혼합된 느낌이었다. 말레이시아 사람들도 한국인처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먹여서 살을 찌우는 것도...)

그중에서도 나는 푸드 업계, 그중에서도 푸드 파이터들이 모인 마케팅팀, 그중에서도 넘버원을 담당한 친구와 함께 살았다. 말레이시아에서 잠잔 시간 보다 먹는 시간이 더 길었던 것 같다. 정말 온종일 먹었다. 입맛에도 잘 맞았던 로컬푸드를 원 없이 클리어하고 떠난다. 한국에 돌아가면 현지 음식이 꽤 그리울 것 같다.


나를 배우는 시간

낯선 곳은 언제나 새로운 나에 대해 배우는 장소가 된다.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다. 나는 생각보다 적응력이 강했다. 생활 반경 내에 한국인,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국인조차 없었다. 처음에는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기우였다. 현지인보다 더 현지인처럼 생활하는 나의 모습이 스스로 뻔뻔하게까지 느껴졌다. 어느새 이들과 동화되어 말레이시아식 영어로 농담을 나누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와야. 웨이라. 엿들은 말레이어로 가족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의외의 빠른 적응력을 뽐내며 현지 생활에 온전히 물들 수 있었다.

고작 한 달하고 며칠이 지났다. 그러나 체감으로 느끼는 시간은 굉장히 길다. 신기하게 팀원들과 가족들도 같은 생각이란다. 그만큼 함께 공유한 경험과 감정이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이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다. 눈물은 안 날 것 같았는데, 친구들과 공항에서 마지막 포옹을 하고 나니 울컥함이 몰려온다.

사실 글에 모든 것을 담진 못하였지만, 한 달간의 삶은 끝없는 현자타임이었다. 미국에 이어 또다시 경험하는 시련에 올해 아홉수(?)가 일찍 왔나 싶었다. 그러나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좋고 나쁜 경험을 떠나 모든 경험에는 성장이 동반된다는 것을 믿는다. 선택에 후회는 없다. 이정도면 그럴듯한 성취다. 이번 경험 또한 한국에 돌아가서 더 크게 성장하는 자양분이 되리라 믿는다.  


그럴듯한 한 해

미국, 시식회, 그리고 말레이시아까지. 2017년이 그럴듯하게 흘렀다. 새로운 나라에서 시작해서 새로운 나라에서 마무리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다채로운 시간이었다. 시야와 경험이 확장되었고, 그 안에서 많은 성장통도 겪었다. 작은 경험이 연쇄적으로 작용해 또 다른 경험을 만들어냈다. 2017년의 합을 모아 2018년도 더 그럴듯하게 보내고 싶다.

한국에 들어가기 전, 홀로 10일 간 호주 여행을 떠난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미국으로 떠난 지 1년 만에 그리고 예정대로라면 미국에서 돌아오는 날에 한국에 도착한다. 왠지 모르게 괜히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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