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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글이드 Nov 10. 2017

그럴듯한 詩作


지난 5일에 열린 <무료詩식회>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3시간 동안 진행된 행사에는 약 80여 명이 방문했다. 후원금은 온, 오프라인을 포함해 총 1,398,050원이 모였다. 조금 부족한 차액은 행사를 함께 기획 및 진행한 잼있는인생의 후원을 받았다.


행사를 처음 기획한 날은 지난 10월 23일이다. 모든 것이 13일 안에 준비되었다. 사실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즐거움과 설렘으로 가득하니 못할 것도 없었다. 2017년이 된 이후로 가장 신나게 웃은 지난 13일이다. 정말로 행복했다.



안동국시에 담긴 마음

10월의 어느 날, 잼있는인생 대표 이예지 선배를 만났다. 선배와 나는 닮은 점이 참 많다. 나는 그런 선배가 좋다. 그 날은 함께 경동시장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시장을 거닐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제나처럼 선배와의 대화는 마음의 울림을 동반한다. 대화 주제에 걸맞게 꽤 쌀쌀한 바람이 시장을 덮었다. 배가 고파진 우리는 따스한 음식이 먹고 싶었다. 사람들 사이에 앉아 국시를 주문했다. 국물 한 모금을 들이켜니 몸의 한기가 금세 사라졌다. 누가 국시에 마법을 부렸는지 마음마저 따스함으로 퍼졌다. 이것이 첫 프로젝트의 시발점이다.  <그럴듯한 詩作> 중

<무료詩식회>를 위해 만든 프로젝트 시집, <그럴듯한 詩作>의 머리글 중 일부다. 행사와 관련한 글을 쓰기에 앞서, 언니와 나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대학교 선후배 사이지만, 사회에 나와 처음 만났다. 알게 된 지 1년 반, 만난 횟수는 고작 3~4번이 전부다. 그런데도 나는 언니가 편했고, 대화하는 것이 즐거웠다. 언니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고 아낌없이 칭찬해주었다. 그중 하나가 나의 시였다. (덧붙이면 나는 평소 사진 찍고, 시 쓰는 것을 좋아한다. https://brunch.co.kr/@inkkou/3)


이번 행사를 기획하기 전에도 언니는 작은 전시를 열어보자고 제안했었다. 그러나 실행되지 않았다. 나는 언니의 칭찬을, 그리고 나의 실력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시간이 흘러 다시 2017년 10월 23일이 되었다. 언니를 따라 경동시장에 갔다. 그리고 시장(市場)에서 시장함을 채우던 중 <무료詩식회>가 탄생했다. 이번에는 왜 마음이 바뀌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사람 냄새가 곁들어진 안동국시를 먹으며 몸과 마음에 따스함을 느꼈다. 그리고 나의 소소한 일상과 감정이 담긴 작품도 누군가에게 따스함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날 나는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재능이 뛰어나고 실력이 엄청나야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상의 작은 무언가에도 충분히 영감을 받을 수 있었고, 부족한대로 시작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이었다.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열정과 의지가 불타올랐다. <무료詩식회>는 그럴듯하게 시작되었다.



태어나 처음 한 일

<무료詩식회>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언니와 함께하는 회의는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샘솟는 아이디어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행사를 준비하면서 나도 모르게 강한 추진력이 뿜어나왔다. 생각으로 존재하던 무형의 것을 직접 만들며 다듬어갔다. 대부분이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행사 포스터 제작을 시작으로 시집과 엽서를 제작했다. 미국에서 곁눈질로 배운 인디자인과 일러스트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도움이 되지 않는 경험이 없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그동안 습작으로 써온 30편의 시와 사진을 다듬었다. 이후 디자인 프로그램에 시와 사진을 앉혔다. 그러나 이게 끝은 아니었다. 페이지 수, 폰트 종류와 사이즈, 간격과 배열, 색상 선택과 디자인 등 생각보다 많은 부분을 신경 써야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작업에 답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시집은 후원해주신 분들에게 드리는 리워드 상품이었다. 굉장한 부담과 책임을 느꼈다. 디자이너에게 맡겨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언니는 나의 중심을 잘 붙잡아 주었다. 조금 부족해도 부족한 대로 직접 만들어낸 결과물이 의미 있다는 결론이었다. 계속해서 밤을 지새우며 수정 작업을 거쳤다. 부족함을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디자인 시안 파일을 완성한 이후에는 인쇄소를 찾았다. 오프라인과 온라인 업체에서 견적을 상담 받았다. 그리고 서점에 가서 수권의 책을 살펴보았고, 한 업체에서 얻은 종류별 샘플지를 만져보며 속지와 표지의 재질을 결정했다. 그렇게 시집이 완성되었다.


다음으로 30종의 엽서를 제작했다. 업체에 인쇄를 맡기는 과정이 복잡했다. 몇 번의 퇴짜를 받긴 했지만, 재단선과 블리드의 난관을 무사히 통과하며 엽서도 완성되었다. 사실 두 결과물이 배송되기까지 나는 쓰레기가 배송되는 악몽을 꾸곤 했다. 그만큼 부담이 컸던 것 같다. 덕분에 마지막 제작 상품인 스티커는 (과장해서) 눈감고도 만들었다.


이 외에도 기획한 내용을 토대로 운영 테이블과 필요한 품목 리스트를 만들어 행사를 준비했다. 직접 도매 시장을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았다. 이 과정에서 재밌는 일들이 많았다. 이동 중에 만난 택시아저씨는 자작곡을 직접 불러주셨고,  또 다른 택시 아저씨는 잃어버린 치킨을 찾아주셨다. 연필 구매를 위해 방문했던 한 업체의 실장님은 詩식회 현장에도 찾아주셨다. 새로운 경험 덕분에 매일 웃을 일이 생겼다.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었다.


텀블벅(https://tumblbug.com/seeseek)의 결과 또한 예상을 뛰어넘었다. 후원금이 쌓여갈수록 부담을 느꼈다. 당시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행사 준비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었다. 마지막까지 詩식회에 몰두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행사 전날이 되었다. 언니와 밤 늦도록 공간을 만들었다. 메인인 뷔페를 중심으로 다른 코너도 즐길 수 있도록 신경썼다.손님들의 동선을 체크해보고, 행사 분위기에 어울릴만한 배경 음악도 골랐다. 모든 것이 처음 기획한대로 착착 진행 되었다. 쾌감이 들었다. 행사를 준비하며 그동안 몰랐던 나를 보았다. 나는 생각보다 디테일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차린 사람이 더 배부른 詩식회

<무료詩식회> 당일이 되었다. 행사는 해방촌에 위치한 달꽃창작소에서 2시부터 5시까지, 총 3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글의 서두에 말했듯이 정말 많은 분이 찾아주셨다. 지인 외에도 텀블벅, 홍보 포스터, SNS 포스팅을 보고 오신 분들이 계셨다. 신기했다. 행사를 위한 모든 행동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詩식회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었다. 오랜 시간 머물며 詩식하는 모습을 보니 감정이 벅차올랐다. 이 외에도 詩작성과 詩식평, 당신의 초상 등 詩식회를 온전히 즐기는 모습이었다. 행사장이 비좁게 느껴졌다. 주말에 시간내서 찾아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사람들에게 따스함을 주고 싶어 시작한 일이었지만, 오히려 내가 넘치게 받았다. 詩식을 하는 사람보다 상을 차린 사람이 더 배부른 詩식회였다.


공식적인 행사는 5시에 끝났지만, 언니의 배려 덕분에 7시까지 행사장을 치우지 않았다. 뒤늦게 부모님이 오고 계셨기 때문이다. 온 지 10분이 지났을까. 부모님은 나의 짐을 챙겨 행사장을 쿨하게 빠져나갔다. 평소처럼 별다른 말도 없었다. 대신 내가 만든 시집과 엽서를 가득 챙겨 주변에 나누어주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참 우리 가족 스타일 답다. 고민을 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부모님께 알려드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행사를 준비하며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많이 느꼈다. 아무래도 인복은 제대로 타고난 것 같다. 혼자였다면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내 옆에 언니가 없었더라면, 詩식회는 없었을 것이다. 나의 재능을 발견해주고, 생명을 불어 넣어준 언니에게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다. 13일 동안 언니와 함께하며 우리는 많이 가까워졌다. 언니와 나는 전생에 무슨 사이었을까 진짜 궁금하다. 나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언니가 참 좋다.


장소와 소품을 협찬해주신 달꽃창작소, 행사를 풍성하게 만들어주신 홍단단 작가님, 시럽수당을 지원해주신 반테이블, 현장과 텀블벅에서 후원해주신 분들, 행사에 찾아주신 분들, 애정 가득한 응원과 관심을 보여주신 분들까지. 감사한 분들이 많다. 모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이들에게 받은 힘은 엄청났다. 단순히 작품과 행사를 넘어 나의 도전과 삶을 응원해주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에 책임을 느낀다. 적어도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겠다. 나도 누군가의 도전에 기꺼이 함께해주는, 그리고 부족한 도전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더할 나위 없었던 詩식회라는 도전을 끝마치고, 이제 나는 또 다른 도전을 위해 잠시 말레이시아로 떠난다. 왠지 엄청난 고생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딱히 새로울 것도 없다. 그러나 또 한 번의 성장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발전된 결과물로 다시 인사드리는 날을 꿈꾼다.



그럴듯한 마무리

행사가 끝난 뒤 언니와 나는 다시 안동국시로 향했다. 완벽한 수미쌍관이다. 이번 행사가 그럴듯하게 시작된 공간에서 그럴듯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고 지난번과 동일하게 따스함을 얻어 가게 문을 나섰다. 비로소 <무료詩식회>가 끝이 났다.



 




번외: 다시보는 무료식회

마지막으로 행사에 못 오신 분들을 위해 <무료식회>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행사는 詩식회라는 컨셉 아래 크게 6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초안으로 구성했던 <무료詩식회> 현장 배치도
<詩식회 안내가이드>

1. 詩식뷔페: 개인 접시를 들고 30편의 詩가 차려진 뷔페로 향한다. 원하는 종류의 시엽서를  담은 후, 詩를 음미하며 천천히 詩식한다.

2. 詩식과 시식: 잼있는인생에서 후원한 최고의 잼과 빵, 크래커로 다과를 즐긴다. 詩와 곁들여 야무지게 시식한다.

3. 당신의 초상: 따뜻한 감성의 일러스트 작가 홍단단 작가님을 모셨다. 시 엽서 뒷면에 '당신의 초상'을 남길 수 있다. 단, 그림을 그릴 시에는 별도의 비용이 발생한다.

4. 詩포장: 접시에 담은 엽서는 Take-out 용기나 처방전 봉투에 담아 포장해간다. 포장 비용은 환경부담금의 목적으로 자율 금액을 기부받는다. 이 금액은 행사 운영기금으로 전액 사용된다.

5. 詩작성: 詩식을 하고 떠오른 영감을 바탕으로 직접 본인의 詩를 작성해본다. 준비된 원고지에 작성한 후 앞에 보드에 붙인다.  

6. 詩식평: 詩식회의 모든 과정이 끝나면 준비된 詩식평가지에 詩식평을 작성한다. 냉철한 詩식평을 기대한다. 참고로 뒤끝은 심한 편이다.


아래의 사진들은 행사에 참여해준 지인들이 직접 촬영하여 보내준 사진이다.

30가지의 詩가 차려진 詩식뷔페
과식한 분들을 대비해 중간중간 비치해둔 소화제
인기 폭발이었던 단단님의 당신의 초상. 위의 사진은 다혜님께서 직접 찍어 보내주셨다.


참으로 꿈같은 시간이었다.


(추가1)

<무료詩식회> 결과 보고서 및 후원금 사용 내역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보았다.


(추가2)

행사 이후 기사에 <무료詩식회>가 나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감사합니다.

http://news.mk.co.kr/newsRead.php?no=763476&year=2017

http://1boon.daum.net/mk/5a0a92516a8e510001384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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