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파스텔
어릴 때 온갖 대회를 마구 나갔다. 내가 뭘 잘해서라기보다 학교가 작았고, 선생님이 시키면 하는 쉬운 학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미술 대회였다. 초1때인가? 나는 둘리 18색 크래파스를 들고 대회장에 갔다. 어찌저찌 뭔가를 그리고 나왔는데 결과는 장려상인가?
뭐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담임 선생님이 심사평 같은걸 우리 엄마에게 전달한 모양이다. 거기엔 대충 이렇게 써 있었다. “….생각은 기발하나 색이 다양하지 못하고….” 우리 엄마는 여기에 충격을 받고 다음 날 금색과 은색, 민트색과 핑크색, 긁어내기와 크래파스 깎기가 들어있는 52색 둘리 크레파스를 사왔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신났지롱.
나중에 음악치료사가 되고보니 엄마가 내게 해준 몇 가지 사건들이 일관적으로 ‘정서지지’와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문제가 되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소거하거나 환경을 바꾸어 주며 그 기저에 나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었다. 그러고보면 엄마는 지금 나보다도 훨씬 어린 나이에 본능적으로 정서지지를 해온 것이다. 어떻게 알고 한거야? 몇 살에 아이를 낳았던지간에 엄마가 된 순간부터 나이는 새로 카운팅 되는 셈이다. 아이가 한 살이면 엄마도 한 살 엄마, 스무살이면 스무살 엄마.
그리고 그건 외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로부터 온 유산인 걸 알았다. 받아봐야 줄 줄 안다는 간단한 진리를 새삼 깨닫는다. 사랑은 그렇게 선명하고도 내리 스며드는 빛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