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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수정 Mar 03. 2024

하고 싶은 걸 하는게 최고의 사치

그리는 취미

나이 들어서 취미생활을 하는 건 꽤나 여유가 있다. 주머니 사정이 녹록치 않았던 스물 몇살때 여행에서 그림을 그리려 산 첫 내돈내산 미술도구는 파버 카스텔의 24색 수성색연필이었다. 그때의 나는 인터넷으로 가격비교하고 홍대 알파에서 실물비교를 아주 꼼꼼히 한 뒤에 열흘 정도 집에서 고민한 끝에 구입했다. 가진 돈이 얼마 없어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뭐 그런걸 추구했다. 파버카스텔의 수성색연필은 색연필로도 쓰고 물을 칠하면 수채물감처럼 쓸 수도 있었다. 게다가 붓도 하나 포함되어 있던, 실용성 갑인 내게 딱 맞는 재료였다.


파버카스텔 색연필은 당시 해외투어를 자주 다니던 나의 여행메이트였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짬을 내어 그리거나, 여행에서 만난 사람에게 그림을 그려주었다. 여행을 다녀와서 여행을 음미하며 그리기도 했다. 나의 이십대는 여행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여행 인플루언서 뺨치는 스케줄이었다. (나의 여행은 싸이월드에 묻음) 그때마다 여행을 다르게 기억하는 방식이 바로 그림이었고, 색연필이 함께했다. 엘에이 공항에서 처참히 찌그러진 색연필 틴케이스는 그야말로 내 그림생활의 역사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24색이 부족하다 느껴졌다. 초록색과 연두색 사이 어떤 색이 필요했고, 바다의 물결을 표현하거나 동물들의 털을 그려보고 싶었다. 그런데 도통 24색으론 표현하기 어려웠다. 슬슬 한정된 색깔로 그리기에 흥미가 떨어졌고 귀찮아졌다.


우리 아빠는 기계든 물건이든 최신의 가장 비싼 것을 샀다. 비싼 필름카메라를 샀고, 우리는 4인 가족인데 12인텐트를 샀다. 텐트인데 방이 있었고 초등학생이던 내가 바로 서도 천장은 닿지 않았다. 아빠는 열심히 여기저기 다니며 우리를 사진으로 찍어주셨다. 아빠는 기왕 살거면 제일 좋은 걸로 사야 후회가 없다고 했다. 어린 맘에 저 정도는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크고 보니 그 말이 종종 맞았다. 초5때 샀던 당시 제일 비싼 디지털피아노는 30년이 지나 아직도 우리 딸과 둥가둥둥 치고 있으니까. 처음 살 때부터 좋은 걸 사면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바꿀 필요 없이 더 길게 쓸 수 있었다. 사치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번에 색연필과 오일파스텔을 고를 때는 브랜드는 고민했을지언정 갯수는 제일 많은 걸 선택했다. 이것들은 물감처럼 섞을 수 없으니 더욱 고민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걸 스물 몇살 돈이 없을 때처럼 가성비를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주머니에 여유가 있다는 것! 이건 마치 직장인이 되면서 탠탠을 반통씩 사 먹고, 마이쭈를 맛별로 장전해놓는 어른이의 사치랄까. 그림을 그리면서 여우의 귀 색깔을 표현할 모래핑크색을 확인하는 순간 소리를 질렀다! 까아 120색 사기를 잘 했어!


사치의 사전적 의미는 ‘필요 이상의 돈을 쓰거나 분수에 지나친 생활을 함’ 이다. 그런데 배우 윤여정은 그의 인터뷰에서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면 사치’ 라고 했다. 그녀의 인생철학이 묻어나는 정의였다. 지난 50년동안 생활고를 겪으며 작품을 닥치는 대로 했다는 그녀는 작품을 고를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야 작품을 고르는 사치를 누리고 있다 했다. 그러고보면 나는 직업을 고르고 돈을 버는 행위가 꽤나 사치적인 행위였다. 집세를 내고 등록금을 벌고 가정을 건사하기 위해 생업전선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대부분일텐데. 이렇게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취미를 가진 것도 어쩌면 하고싶은 걸 하고 살 수 있는 사치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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