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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글을 좀 쓰는 사람입니다

잘 쓰는 거 말고요, 즐겁게 쓰는 거요.

by 진경

많은 사람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싶어합니다.


사실 재능은 자신보다 남이 알아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연민이나 자만심 같은 감정 없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일은 정말이지 어려우니까요.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고, 저를 포함한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은 남에게 오지랖을 부리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중 대부분의 말은 잔소리나 빈말처럼 의미 없이 지나쳐가긴 하지만 그 중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면, 심지어 그게 꽤 여러 번이라면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만 합니다. "너 진짜 ~~ 잘한다니까, ~~ 해보면 어때?" 물론 꼭 맞는 말은 아니지만요.


다른 분야의 일은 잘 모르지만 저는 그림과 글 분야에 몸을 담았기 때문에 재능 이야기를 자주 듣곤 했습니다. 제가 살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너는 그림에 재능이 있어."였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의 저는 그림을 전혀 그리지 않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더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만 적어도 지금은 아닙니다.


반대로, 저는 살면서 글을 잘 쓴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작가라면 대체로 학교 다닐 적에 무슨무슨 글짓기 대회 같은 데서 상을 받기도 하고, 주변인으로부터 글 잘 쓴다는 말을 한 번은 듣는다던데 저는 도통 그런 기억이 없습니다. 그땐 그림 그리는 데 몰두하느라 글을 쓴 일이 거의 없긴 했습니다. 일기 쓰기 숙제도 매번 줄공책 위에 휘리릭 그림을 그려서 내버리곤 했으니까요. 저는 어떨결에 시도해 보고 "어, 이거 재미있네?" 라며 나의 길을 발견하게 된 사례입니다. 물론 어떤 일을 직업으로 삼아 돈을 번다고 해서 꼭 재능이 있다는 건 아니겠지만요.


작가들 사이에서 재능은 참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주제입니다. 재능 있는 작가란 어떤 작가일까? 작가의 재능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어느만큼 갖고 있어야 재능이 '있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일까? 재능은 눈에 보이지 않고 구체적인 지표도 없기 때문에 명확한 결론이 나기 어렵지만 각자 글쓰기 행위를 해오는 동안 접한 여러 사례를 통해 재능에 대한 나름의 의견을 갖기 마련이라 이 주제로 대화를 시작하면 금새 열기를 띠게 됩니다.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대화가 되곤 하지만 그럼에도 공통점은 있습니다. 대체로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가는 재능이 있다고 여겨지고, 성공하지 못한 작가는 재능이 없다고 여겨진다는 점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저는 좀 재능이 없는 편입니다. 특히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글쓰기"에 있어서는요.




저는 글쓰기를 무척 좋아합니다.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가장 많이 쓰는 건 역시 웹소설이지만 짧지 않은 호흡의 작품을 완결 지어서 서비스 해야한다는 특성 때문이고, 그 외의 글을 쓰는 것도 무척 좋아합니다. 게임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수십 쪽짜리 기획서를 쓰는 일 역시 꽤 잘 해냈었고요. 덕분에 대부분의 작가가 어려워하는 기획 의도 쓰기 역시 꽤 빠르게 해냅니다. 블로그에 후기나 리뷰 등을 쓰는 것도 좋아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10분씩 일기를 쓰고 주말에는 따로 시간을 내서 몇 시간씩 일기를 쓰기도 합니다. 그냥 활자로 된 글을 적는 것 뿐 아니라 그걸 보기 좋게 만드는 것 역시 좋아합니다. 기획서를 보기 좋게 다듬거나 활자의 내용을 표나 그래프로 정리하는 것 역시 저를 즐겁게 하는 일 중 하나입니다.


가끔 다른 작가의 인터뷰를 읽거나 작가 지인들과 대화하다보면 이런 내용의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글 쓰기 시작하기 전에 예열 시간이 꼭 필요해." 혹은 "흰 화면에 검은색 커서가 깜빡이는 걸 보고 있으면 막막한 기분이 들어." 그런 얘기를 들으면 저는 눈을 댕그랗게 뜹니다. 그래? 그런가? 나는 아닌데? 저는 작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전에도 후에도 글쓰기가 막막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아, 물론 전날 과음을 해서 숙취에 시달리고 있다든가 감기에 걸려서 몸이 아프다든가 과도한 악플 때문에 상처를 받아 울적할 때는 도저히 글을 쓸 수 없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이 해결되면 언제 쓰지 못했냐는 듯 다시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씁니다. 뭐든 씁니다. 저는 대체로 마감이 없지만 스스로 만든 일정에 따라 쓰고 또 씁니다.


그렇게 7년쯤 지나고나니 이제는 좀 알겠습니다.

글쓰기의 재능이라는 게 글을 잘 쓰는 것 하나만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것을요. 노력도 재능인 시대입니다. 그저 어떤 일을 좋아하고 그것을 계속할 수 있는 것 역시 재능일 수 있겠더라고요. 글을 참 잘 쓰는 데다가 그걸로 유명세를 얻었지만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운 작가나 쓰고 싶고 써야하지만 도저히 써지지 않아 고통스러운 작가들은 저를 무척 부러워했습니다.




물론 즐겁게 글을 쓰는 것이 좋기만 한 건 아닐지도 모릅니다.

창작에는 고통이라는 것이 따르는 법이라는데 저한테는 고통이 오지 않으니까요. 고통 없는 창작이라 흥행이 나를 빗겨 가는가 싶은 생각을 했습니다. 윤동주의 싑게 씌어진 시는 제목만 쉽다고 쓰였지 절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쓴 시였는데, 저는 말 그대로 그리 어렵지 않게 글을 썼습니다. 한 시간 반 만에 A4용지 네다섯 장 분량의 글을 털어내고나서 "와! 오늘 글 다 씀! 뿌듯! ^0^"하는 일기를 쓰기까지 합니다.


뭘 하든 고만고만한 성적이었습니다. 초기에는 다 쓴 작품, 혹은 프로젝트를 파기해야 할 때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 요령이 생긴 뒤에는 아주 쪽박을 차는 일만큼은 없었습니다. 그게 다 였습니다. 글을 써서 우리 가족이 먹고 살 만큼의 돈을 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시급 정도는 벌어서 용돈이나 가족 여행 한 번쯤은 갈 수 있었습니다. 참 애매하지요. 글을 즐겁게 쓰는 게 재능인 건 알겠는데, 그게 끝인가...?


저는 쓰는 사람인 동시에 읽는 사람입니다. 매일매일 수도 없이 쏟아지는 글들을 봅니다. 어떤 것은 스치듯이 어떤 것은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저기 먼발치에서 반짝이는 사람들을 올려다 봅니다. 똑같이 이야기 빚는 일을 하지만 나와는 차원이 다른 섬세함을 가진 사람들, 똑같은 경험을 하고도 그것을 나보다 더 멋지게 전달하는 사람들을 동경합니다. 어떨 때는 나보다 잘 나가는 타인이 가진 글쓰기의 재능이 나와 비슷해보여 질투를 할 때도 있고, 어떨 때는 너무 멋진 글을 만난 나머지 저 사람과 내가 매만지는 것이 똑같이 한글 자모음 24개가 맞는가 싶어 자괴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도 별 수 있나요. 창작의 고통을 만들겠답시고 매일 투명 의자 상태에서 글을 쓸 수는 없는 일인 걸요. 힘든 일이 좀 있어도 며칠 지나면 잊어버리고 다시 흥겹게 자리에 앉는 게 저인 걸 어쩌겠습니까. 한강 작가님이 인터뷰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글을 쓰는 게 나에게 너무 절박하고 간절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수 밖에요.


저는 글 쓰는 게 무척 즐거운 사람이고요, 그것 하나는 확실히 장점인 사람입니다.

읽는 사람들에게 어필하기 좋은 장점은 아니지만 어쩌겠어요. 덕분에 오늘 쓴 글자수 3400자만큼 행복해졌으니 그것으로 만족해 봅니다. ꒰(っꈍ~ꈍ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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