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고스트 스토리>의 유령을 보다가
무서운 게 싫다. 무서운 건 내게 어떤 좋은 작용도 하지 않는다. 공포를 즐기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공포 영화도 마찬가지다. 보는 동안 기분이 엄청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계속 그 잔상에 시달리는 것도 싫다. 새벽에 혼자 걸을 때면,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살면서 봐온 무서운 모든 장면들이 떠오른다. 그런 순간을 대비해서라도, 무서운 걸 최대한 안 보려고 한다.
"유령을 믿어?"
누군가 내게 영혼, 유령 등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믿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로 본 적도 없고.
"그런데 어딘가에 있을 것 같긴 해".
솔직히 말하자면, 믿기는 한다. 다만 그렇게 입으로 말하면 정말 나타날까 봐 무서울 뿐이다. 굳이 발화하지 않고 마음으로만 생각한다. 사람이 죽으면 어딘가에서 우리가 볼 수 없는 형태로 존재하지 않을까.
"죽기 싫어."
나는 죽고 싶지 않다. 내가 현대 과학 기술에 가장 크게 바라는 건, 내가 죽기 전에 영생을 사는 기술을 만들어주는 거다. 삶에 대한 미련이 넘쳐나는 사람이다. 아침마다 영양제를 12개씩 먹는 건 괜한 게 아니다. 죽을 때가 되면 냉동 인간으로 나를 얼리고 싶을 정도다. 삶에 대한 욕구가 이렇게 강하기 때문에, 무서운 것을 그렇게도 싫어하는 게 아닐까. 나는 농담으로라도 죽고 싶다고 말하지 않는다. 죽고 싶지 않고, 말은 씨가 될 때가 있으니까.
아마도 영생을 불가할 거다. 가능할 수 있는데 괜히 내가 이런 말 해서 부정 타는 게 아닐까 걱정이긴 하지만, 그런 기술은 나타나도 아주 먼 훗날이 아닐까 싶다.
"감각이 없다는 게 두려워".
아침에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내가 기절하듯 자는 동안 아무것도 감각하지 못했다는 거다. 내가 살아있어야 감각이 가능하다. 죽으면 어떤 것도 감각할 수 없다. 무엇인가를 볼 수도, 냄새를 맡지도, 맛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이런 감각들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는 건, 의미보다 감각을 중요시하는 내게 너무 가혹하다. 아니, 감각이 없으면 의미를 만들 수 없다.
'차라리 유령이 나을지도 몰라'.
죽고 나서 어떻게 될까. 거기에 대한 답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종교도 없는 내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주로 '아무것도 감각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도 인지 못하는 깊은 수면 같은 게 아닐까' 정도다.
영화 속에서 유령을 보면, 차라리 유령처럼 사람들 눈에 안 보이는데 인간을 보거나 들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는 내가 죽었을 때 유령이라도 되고 싶은 마음에, 보험 같은 마음으로 유령을 믿는 걸까. 영생이 안 된다면, 냉동인간도 소용없다면, 유령으로라도 세상에 남고 싶은 미련 덩어리의 마음.
영화 '고스트 스토리'는 유령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작품이다. 유령은 서부 시절의 벌판에서부터 최첨단의 건물이 들어선 도시까지 계속 그 자리에 머문다. 전구 불빛을 흔드는 등 나름의 방식으로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유령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없다. 그저 유령이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다고, 수많은 경우의 수 중 하나로 치부할 뿐.
유령의 입장으로 바라보니, 유령으로 지내는 건 썩 유쾌해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소유욕과 인정욕구가 넘치는 사람인지라, 계속 바라보다 보면 내 존재를 알리고 닿고 싶어질 것 같다. 영화 속에서 접시를 깨고 깽판을 치는 유령처럼, 난폭해져서 결국 모든 이들을 떠나보내는 유령이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젠 내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지도 기억나지 않아".
영화 속 유령이 남긴 말이 마음에 남는다. 인간도 기다림에 지치기도 하는데, 기다림이 존재 이유가 된 유령이 된다면 얼마나 힘들까. 유령이 되기 위해서는 기다림을 연습해야 하나. 그래서 사람들은 살면서 반드시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을 거쳐는 걸까. 좋은 유령이 되기 위해 살면서 기다림을 예행 연습하는 삶이 되는 건 의미 있는 걸까. 참을성이 없는 나는 유령이 되기에 적합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독립을 한 이후로는 혼자 있는 집에서 위험한 상황을 최대한 안 만드려고 한다. 혼자 살다가 화장실에 갇혀서 죽었다는 괴담도 괜히 떠오른다. 고개를 숙였다가 머리를 박거나, 계단에서 미끄러질 뻔할 때마다 생각이 많아진다. 혼자 있는 집에서 유령이 된다고 해도,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안 올지도 모르는데. 유령이 되어서는 내가 사라진 집에 찾아온 가족을 봐도 반겨줄 수가 없는데. 고독사가 무섭다는 걸, 유령이 되는 걸 상상하고 나서야 실감한다.
완전히 사라지는 것보다는 그래도 유령이 나을까. 나는 왜 이렇게 삶에 집착하는 걸까. 본능인 걸까.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본능을 숨길 때가 많지만, 살고 싶다는 본능은 숨겨지지 않는다. 내일도 당연히 살아있을 거라는 생각이 가장 큰 오만은 아닐까. 내일은 유령이 될 수도 있다는 상상은 과한 냉소이므로, 중간 지점을 찾아보기로 한다.
유서를 쓰는 것과 유령이 되는 걸 상상하는 건 조금 다른 감상 같다. 죽음을 떠올리는 것과 죽음 이후를 떠올리는 건 다른 종류의 감정일 테니까. 유령이 된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건 그저 지켜보고 기다리는 것 뿐이므로, 삶에 대해 더 생각해본다. 삶은 너무 변수가 많다. 죽음이라는 변수도 생각 안 할 수 없다. 다만 너무 과한 기다림은 이전보다 멀리하기로 해본다. 기다림은 삶 이후에도 너무 많을 것 같으니까. 성질이 급한 사람으로 태어난 건 지극히 합리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커버 이미지 : 영화 '고스트 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