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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Aug 08. 2021

나도 한강 가봤다!

혼자 처음으로 걸어 본 한강

기분이 안 좋을 때 집에만 있으면, 안 좋은 기분을 가둬두고 계속 관찰하는 기분이 든다. 작은 병 안에 불행을 가둬놓고 계속 관찰하고 있는 것 같지만, 조금만 멀리서 보면 불행이 우물 안에 갇힌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므로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쁠 때는 밖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 집에서는 모든 것이 익숙하기에 그중에서 가장 자극적인 감정인 불행에 눈이 가지만, 밖으로 나가는 순간 낯선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불행 대신 관심 둘만한 것들이 제법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한강 자주 가겠네".


집은 한강에서 멀지 않다. 사는 동네를 말하면 반사적으로 한강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동네 이웃인 선배가 끌고 나왔을 때 말고는 자발적으로 한강에 간 적이 없다. 집 앞에 편의점 가는 것도 작정해야 가고, 그나마 제일 많이 가는 곳은 다이소다. 다이소에도 물론 볼 것이 많지만, 오히려 한강이야말로 볼거리가 무한에 가까울 텐데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나도 나의 마음을 잘 몰라서 기분이 안 좋은 걸까.


재택근무를 마치고 기분을 풀 겸 영화나 예능 프로그램을 볼까 했다. 그런데 몸을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나가게 되면 빨래할 옷도 늘어나고, 선크림도 발라야 하지만 안 좋은 기분을 해소하는 것에 비하면 가성비가 좋다고 여기고 나가기로 한다. 재택근무 기간 동안 면도를 안 해서 잔뜩 자라난 수염을 마스크로 가리고, 여름에는 해가 늦게 지므로 선크림을 바르고, 안경에 김이 서리는 게 싫어서 원데이 렌즈를 끼고 밖으로 나간다.


한강은 넓다. 어디 쪽으로 갈까 하다가, 이전에 동네 이웃 선배와 함께 갔던 망원 쪽으로 간다. 평소에 빠르게 걷는 게 습관이라, 어느새 걸음이 빨라지고 눈 떠보니 성산대교 쪽이다. 목적지를 향해 경주마처럼 빠르게 걷고 싶은데, 목적지가 딱히 없다. 일단은 다음 다리까지 걷기로 한다. 그렇게 양화대교가 등장한다. 여기까지 온 김에 좀 더 걷기로 한다. 그렇게 서강대교까지 간다.


한강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 뛰는 사람 등 운동이 주가 된 사람들, 데이트를 하다가 온 이들, 한강 근처에 온 김에 잠시 한강 구경을 온 것 같은 이들. 옷차림으로 그들이 한강에 온 목적에 대해 생각해본다. 딱히 목적지도 없으므로, 사람들을 좀 더 보게 된다. 노을이 지는 게 예뻐서 멈춰서 하늘을 찍는 이들이 많다.


'예쁘네'.


굳이 촬영을 하지는 않고,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혼자 생각하고 가던 길을 간다. 여전히 나의 태도는 한강을 즐기러 온 사람이라기보다,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빠르게 걷는 사람이다. 에스키모인들은 걱정이 사라질 때까지 걷고 나서 깃발을 꽂은 뒤에, 다음에 또 고민이 생겼을 때 그 깃발을 지나는지 여부에 따라 걱정의 정도를 파악한다는데, 다음에 내가 어디까지 걷는지로 판단하게 될까.


장거리 달리기를 단거리 달리기의 주법으로 뛴 것처럼 다리가 아파온다. 서강대교에서 올라가 상수역에서부터 집까지 걷는다. 그냥 가기는 아쉬워서 망원시장에 가서 집에 다 떨어진 계란과 바나나를 산다. 망원시장에서 무엇인가를 산 것도 처음이다. 늘 온라인으로 무료배송 가격에 맞춰 장보기를 하고, 바나나도 집 앞 편의점에서만 사다가 드디어 시장에서 무엇인가를 샀다.


한강을 걸었다고 안 좋은 기분이 다 해결된 건 아니다. 궁극적인 해결이 가능한 문제라기보다 시간이 지나면 희석되는 성격의 문제이기 때문일 거다. 그저 시간이 지나기까지 집에서 혼자 우울한 기분으로 있는 게 싫어서, 정신을 돌리려고 한강에 나왔을 뿐. 당장 해결 불가하다면, 유예도 나쁠 해결법은 아니다.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할 뿐이다. 내가 지금 당장 갈 수 있는 가장 광활한 곳이 한강이므로, 그곳에 가는 것처럼.


"그치, 한강 가지".


이제 주변 지인들이 한강에 자주 가냐고 물으면 태연하게 한강을 자주 간다고 할 거다. 한번 해놓고 일상인 것처럼 구는 건 나의 특기다. 기분이 안 좋을 때만 한강에 가면, 기분이 나쁠 때 한강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 한강에 가면 기분이 나빠질까 걱정이 되지만 한강은 몹시 길다. 성산대교까지는 기분이 나빠도, 양화대교, 서강대교 나아가다보면 기분이 나아질 거다. 시간이 약이듯, 몸을 쓰는 시간이 늘면 좋아질 거다. 한강물을 약처럼 마시진 못해도, 한강을 약처럼 바라보고 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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