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후 13개월: 아가가 처음으로 증조외할머니를 만나고 왔다
우리 외할머니는 38년 생이신데 아직도 정정하게 제주도에서 작은 귤밭을 가꾸시고 사다리를 오르신다. 하루 종일 틀어져 있는 티비를 통해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갈등에 대해 궁금증을 품으시기도 하고, 나보다도 요즘 아이돌에 대해 빠삭하시다. 언제나 당당히 할 말을 하시는 할머니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쿨하신 분이시다.
오랜만에 집 안에 등장한 아기의 존재가 궁금하셨을 법도 한데 할머니께서는 어린 아기가 비행기를 타면 놀랄 수 있다고 우리의 제주도 방문을 여태 반대하셨다. 쿨하신 할머니는 빈 말을 하시는 법이 없으시고, 할머니의 말은 그 누구도 거역할 수가 없다. 아기의 돌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할머니의 허가가 떨어지고 아가와 함께 제주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 아가와 나, 나의 엄마, 그리고 나의 외할머니까지 성씨가 모두 다른 모녀 4대의 짧은 동거가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제주도에 간 엄마는 할머니에게 새로운 문물을 알려주고 싶어 안달이셨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려 드리기도 하고, 할머니 입맛에 맞는 새로운 음식을 맛보여드리고 싶어서 어딜 가든 꼭 포장을 해가셨다. 그 모습이 꼭 엄마를 생각하는 내 마음 같았다. 아, 우리 엄마도 엄마이고 할머니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딸이셨지. 너무 당연한 사실일수록 새삼 깨달을 때 더 크게 뒤통수가 울린다.
아기를 낳은 이후부터 나는 엄마가 되었고, 우리 엄마는 할머니가 되었다. 철저히 아기가 중심이 되어 우리의 세상이 재편되었다. 할머니가 된 나의 엄마에게는 챙겨야 할 입이 두 배로 늘었다. 누군가의 딸이자, 엄마로 살아오던 우리 엄마는 이제는 누군가의 할머니가 되어 손녀의 양육까지 함께 걱정해주는 처지가 되었다. 엄마의 삶의 무게는 왜 늘어나기만 하는걸까. 그래도 연신 13개월밖에 안된 것이 이것도 할 줄 아냐며 감탄을 하시던 나의 할머니를 보고 있자면 어쩌면 우리에게 더해지는 삶의 무게는 곧 그만큼의 행복을 위해 지출하는 비용이겠거니 싶기도 하다.
4대가 오순도순 앉아서 귤을 까먹고 있으니 새삼 우리가 모두 다른 성씨를 가지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두뇌활동과 관련된 유전자는 모계의 영향이 많다던데 누구보다 서로를 닮은 우리의 존재감은 서로 다른 성씨로 발현되고 있다. 먼 훗날 성씨를 중심으로 한 족보에서는 우리 4대의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괜시레 조금은 분하기도 하다. 그래도 오늘도 나는 바삐 아기 밥을 해 먹이고, 내 밥은 엄마가 해다 준 반찬에 겨우 구색을 갖추는 모습을 보며 그 어떤 족보보다 확실한 모계만의 내리사랑 족보를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