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 달 살기 3주, 4주차 일상
2024/2/1 목요일, 19일차
이 날은 남편이 제주시내 호텔에서 진행되는 학회에 참석했다.
제주에서 지내다보니, 서울에서 살면서 가끔 여행갈 때는 몰랐던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서귀포시와 제주시는 생활권이 완전히 분리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서귀포에서도 상대적으로 촌에 숙소가 있기 때문에, 남편이 시내로 나가는 이 날을 놓칠 수 없었다.
남편은 학회에 가고, 나는 근처 제주도립미술관에 갔다. 일제 시대에 활동했던 제주 태생 작가들의 작품 몇 점이 전시된 상설 전시관과 앙리 마티스와 라울 뒤피의 기획전이 진행 중이었다. 이 날 라울 뒤피 작품을 보고 느낀 점을 Threads에 남기기도 했는데 여기에 다시 옮겨 적는다.
제주도립미술관에 갔다. 라울 뒤피와 앙리스 마티스라는 너무나 인기가 많은 두 작가의 작품전이 있었다.
일전에 더현대에서 라울 뒤피전를 보고 너무 별로여서 실망하며 빠져나왔는데, 그 지점을 오늘 또렷히 파악했다.
탈곡을 하고 채석을 하는 그림도 너무 예쁘다는게 문제다. 전시 말미에 뒤피의 일생을 조망하는 다큐에서는 그렇게 모든 순간에서 아름다움과 기분 좋음을 포착하는 것이 더 어렵다며, 라울 뒤피는 그 주제에 천착한 작가라고 했는데 나랑은 취향이 안 맞는다.저 그림 속 농부와 광부는 분명 살이 찢기고 땡볕에 살갗이 타는 화상을 입으며 노동을 했을터이다. 노동이 아름답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라울 뒤피의 그림에서는 노동의 본질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Just look on the bright side" 로 함축할 수 있는 그의 예술 세계는 내게 전혀 와닿지 않는다. 마치 fake positivity 로 점철된 이 세상 같다. 그래서 요즘 라울 뒤피가 잘 팔리나 싶다.
낮에는 미술관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다가 1시간 정도 걸어서 제주 시내까지 걸어왔다. 이 날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고, 덕분에 내가 신은 어그부츠가 홀딱 젖었지만 그렇게 걷는 시간 속에서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저녁에는 잠깐 짬을 내서 나온 남편과 저녁을 먹었다. 제주도까지 와서 무슨 프렌치인가 하겠지만, 1주일에 2번씩 고등어회를 먹다보면 저절로 이런 음식이 생각나게 된다.
남편은 다시 저녁 행사에 갔고 나는 근처 카페에 가서 책을 읽었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고 남편과 남편의 직장 동료분이 있는 와인바로 가서 30분 정도 같이 이야기를 하다가 집으로 귀가했다. 뭔가 시골사람이 시내에 나가서 도시 체험을 한 날이었다.
2024/2/2 금요일, 20일차
이 주 내내 학회로 바빴던 남편이 이 날은 오후에 휴가를 내고 카트를 타러 갔다. 다음 주에 운전면허 도로주행 시험이 남은 내가 나름대로 연습이 될 것 같아서 가자고 했다. 결론적으로 운전 연습에는 딱히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마당 고양이들에게 밥을 계속 주다보니 그 중 가장 경계심이 낮은 아기고양이는 제 나름대로 와서 아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카트라이드 후에는 잠깐 카페에 갔다. 작년 9월에 왔을 때 좋았던 Veke 에 재방문 했는데 겨울에 오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 때도 두번째 건물을 짓고 있었는데 아직도 공사 중이어서, 요즘처럼 빠르게 건물을 올리는 시대에 거의 6개월 동안 작업 중이라니 굉장한 장인 정신이 있나 싶었다.
저녁에는 숙소 근처 동네인 고산의 식당에 갔다. 아시안 퓨전 음식을 파는 곳이었는데 서울에 와서도 통할 만한 식당이었다. 원래는 서울로 올라오기 전에 한번 더 가자고 했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다.
이 날은 브런치에 썼던 제주에서의 첫 2주간의 이야기를 올린 글에 반응이 갑자기 몰려와서 남편과 둘이 하루종일 신기해하면서 보냈다. 1만뷰가 넘고, 1시간에 1천뷰 씩 올라가고, 구글 크롬 뉴스피드에도 글이 올라갔던 날. 생각보다 제주 한 달 살기에 다들 관심이 많은가 싶다.
2024/2/3 토요일, 21일차
이 날은 하루종일 비가 와서 밖에 나가지 않았다. 아마도 제주에 와서 한 발자국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유일한 날이 었던 것 같다. 서울에 있을 때에는 날이 추운 겨울이나, 그냥 좀 귀찮은 날에는 집에만 있는 날이 드물지는 않았는데 제주에 와서는, '여기까지 왔는데' 라는 보상 심리도 작용하고 바깥 풍견이 워낙 예뻐서 줄곧 나갔던 것 같다. 제주에 머문지 3주 정도가 되니까 그런 보상 심리를 내려놓게 되었다.
저녁에는 근처 횟집에서 딱새우와 모듬회를 사서 그동안 아껴두었던 샴페인 Ruinart를 마셨다. 내가 유독 좋아하고 남편는 별로 감흥이 없다는 샴페인 브랜드.
2024/2/4 일요일, 22일차
제주도에 오고 나서부터 우리 둘이 꼭 하자고 했던 몇 안되는 것 중 하나는 바다낚시였다. 나는 민물낚시도 바다낚시도 해 본적이 없어서 낚시에 대해서 일종의 환상이 있었고, 남편은 일전에 바다낚시를 몇 번 해보고 꽤 자신이 있어서 알게모르게 내게 능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듯 했다.
막상 낚시를 해보니 상황은 전혀 달랐다. 우선 나도 남편도 낚시에는 완전히 젬병이다. 거의 한 시간이 넘게 낚시를 했는데 나는 겨우 4마리, 남편은 1마리를 잡았다. 이걸 쓰면서도 웃지 않기가 힘들다. 이 날 같은 배에탄 다른 팀은 6명의 가족이었는데,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꼬마 남자애가 커다란 고기들을 거의 20마리 가까이 잡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지금 하는 밥벌이에 더욱 집중하기로 다짐했다. 일 말고는 딱히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는 부부.
가게로 돌아가니 낚시로 잡은 5마리의 놀래미로 튀김을, 선장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챙겨주신 돌병어를 회 쳐서 먹었다. 주방 이모들이 말씀 하시기로는 돌병어가 보통은 싯가로만 판매되는 비싼 물고기라서 오늘 낚시에 쓴 돈은 본전을 보고도 남긴다고, 티가 나게 적은 양의 물고기를 잡은 우리를 위로해주셨다. 근데 진짜 돌병어 회가 맛있긴 했다.
2024/2/5 월요일, 23일차
이 날은 도로주행 수업을 4시간 동안 했다. 기능시험 때 생각보다 무섭지 않아서 도로주행 수업을 기다려왔는데, 아침부터 장대비가 와서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다. 오전에 서울로 출근하는 남편의 차를 타고 학원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학원으로 갔다.
부산 사투리 억양이 강하게 밴 강사님과 4시간 동안 수업을 했다. 수업 초반까지는 비가 많이 와서 사이드 미러도 제대로 볼 수 없어서 긴장을 많이 했는데, 후반 부에는 날이 개서 애월 앞 바다를 내려다보며 주행 수업을 할 수 있었다. 이것 또한 돌아보니 제주도에서만 할 수 있었던 독특한 경험 중 하나였다.
2024/2/6 화요일, 24일차
이 날은 날이 좋아서 오전에 집 청소를 한 뒤에 간단하게 점심을 해먹고 산책을 하러 나왔다. 집 앞에서 부터 밥을 주고 있는 고양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동안 밥 주면서 본 고양이가 7마리 정도 되는데, 이 날 4마리 정도는 오며가며 만나서 인사한 것 같다. 돌담에 앉아서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는 제주 고양이의 삶이란.
이날은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집에만 있기가 아까워서 택시를 타고 집 근처로 나갔다.
하소로 커피가 있는 곳에서부터 저녁 식사 장소까지 1시간을 걸었다. 네이버 지도로는 1시간 10분 거리였는데, 50분을 조금 넘게 걸으니 도착했다. 늦은 오후 시간이라 해가 질까봐 무서워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남편과 연애할 때 처음 온 제주도 여행에서 갔었던 수제버거 가게인 양가형제에서 저녁를 먹었다. 식사를 하고 나니 7시가 다 되어가서 어두워졌고, 카카오 택시는 오지도 않았다. 가게 사장님이 알려주신 한경면 콜택시로 겨우 집에 돌아왔다.
저녁엔 서울에서 돌아온 남편과 맥주 한 잔을 하면서 잠에 들었다. 마침 요르단과 아시안컵 4강전 경기가 있었는데, 맥주 마시고 피곤해서 중간에 잠들어 버려서 경기를 제대로 못 본 우리가 승자였다.
2024/2/7 수요일, 25일차
대망의 도로주행 시험날! 남은 2시간 수업을 먼저 한 후 바로 시험을 치게 되었다. A~D 코스까지 있고 랜덤으로 뽑기를 통해서 코스가 지정 되는 형식인데, 운이 좋게도 가장 쉬운 A코스로 당첨 되었고 어렵지 않게 통과했다. 학원 바로 앞에 있는 기관에서 바로 운전면허증을 발급 받았다. 발급지가 맨 아래에 표기 되는데, '제주도특별자치도경찰서' 라고 적혀 있는게 신기하다.
저녁에는 나의 운전 면허 취득을 자축하며 남편과 남은 고기들로 식사를 했다. 바로 다음 날 부터는 설날 연휴를 맞이해서 시부모님이 오실 예정이었기 때문에, 냉장고도 비울 겸 둘 만의 마지막 제주도 파티를 가졌다.
2024/2/8 목요일, 26일차
이번 설은 대구에 계시는 시부모님이 제주로 오셨다. 제주로 가기 전부터 계획했었고, 쉬러 가는데 굳이 안 가겠다고 한사코 거절하시는 걸 겨우 오시라고 해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여태까지 한번도 직접 음식을 해드린 적이 없었는데 (그야 할 줄 아는 요리가 별로 없기 때문에...) 이번에는 꼭 대접하고 싶었고, 약소한 실력으로 점심을 해드렸다. 두 분다 너무 좋아하시면서 사진도 여러장 찍으셨다.
오후에는 카페에 가고, 수월봉에 올라가고, 저녁에는 고등어회를 포장해와서 식사를 했다.
2024/2/9 금요일, 27일차
숙소에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당산봉 근처에서 간장게장정식을 먹은 후 당산봉에 갔다. 당산봉은 제주 서쪽 오름 중 수월봉의 유명세에 밀려서 그렇게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실제로 올라가보니, 수월봉보다 훨씬 경치가 좋았다.
오후에는 산방산에 가서 만발한 유채꽃을 구경하고, 중문으로 가서 흑돼지를 먹었다. 2박 3일 동안 효도 코스로 시간을 보냈는데, 생각한 것보다 부모님이 훨씬 행복해하셔서 뿌듯했다. 매년 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렇게 기회가 될 때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은 둘 만 다니는 여행과는 또 다른 마음 속 충만함이 생기는 것 같다.
2024/2/10 토요일, 28일차
원래 우리의 체크아웃은 12일 월요일이었다. 그런데 설 연휴, 게다가 월요일이 대체공휴일로 지정 되면서 제주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티켓이 모두 매진 되어버렸다. 당장 연휴가 끝나면 밤을 새서 마무리 할 프로젝트가 있는 남편의 일정상, 무조건 연휴 중에는 서울로 복귀 해야했고 어쩔 수 없이 남은 숙박 일정을 뒤로 하고 토요일에 체크아웃을 하게 되었다.
새벽 일찍 부모님을 제주 공항으로 모셔다 드리고, 다시 숙소에 복귀해서 넷플릭스 신작 <살인자o난감> 을 본 후 낮잠을 잤다. 오후에 남겨진 최대 과제! 심바를 캐리어에 넣고 그동안 생활한 모든 용품들을 정리해서 차에 실은 후 무사히 비행기를 타는 것이다. 서울에서 제주로 올 때보다야 수월하긴 했지만, 이번에도 심바와사투를 하고 미친듯이 짐을 정리한 뒤 갑자기 내리는 눈을 뚫고 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를 탔다.
심바는 나름대로 두번째 비행이라 그런지 첫 비행보다는 안정된 상태로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의도 집에 도착해서도 1시간은 짐을 풀고 넉다운 되어서 잠을 청했다.
제주도에 있으면서 그 어느 때보다 혼자, 조용하게 시간을 많이 보내면서 여러 생각들을 했다.
서울에 돌아온지 이제 딱 1주일이 된 지금 시점에서, 아직까지도 기억나는 조각들을 정리해본다.
1/ 장난스럽게 스스로를 서울촌년이라고 이야기 하곤 했지만, 그것의 진짜 의미를 제대로 생각해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평생 서울에서 살았고 2주 이상 길게 시간을 보냈던 곳들도 한국의 지방이 아닌 해외 도시들이다 보니, 서울 외의 지역에 대해서는 가끔 짧은 시간을 보냈던 여행자의 시선 외에는 가져본 적이 없던 것이다. 이번에 제주도에서도 관광지가 없는 지역에서 지냈다보니, 생활 터전으로서의 지방을 처음 경험하게 되었다. 지역민들이 농사 지은 무를 수확하는 모습, 아침 일찍 카페를 여는 사장님, 주말에 바다 근처로 나들이를 나온 가족들. 이런 모습들을 자주 접하면서 여행자적 낭만적인 시선을 거두고 구체적 삶의 배경으로서의 지방을 인식하게 되었다. 한국에 산다면 절대로 서울 아닌 곳에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해왔고, 물론 지금도 어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만약 상황이 만들어진다면 이제 지방에 사는 것도 거리끼지 않을 것 같다.
2/ 이전 글에서도 이야기 하긴 했지만, 하루에 많은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배웠다. 하루에 두 끼 정도를 준비하고, 집을 청소하고, 고양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 정도면 하루가 꽉 찬다. 퇴사를 하기 전의 나는 하루에도 수만가지의 일을 했다. 단순히 업무 안에서 to do list 가 아니라, 생활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하루에 여러가지 일을 정해두고 다 하지 못한 날은 알 수 없는 패배감에 시달리곤 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배웠다.
3/ 원래도 혼자 잘 노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 시간들이 나에게 주는 의미도 더욱 잘 소화하게 되었다. 내가 왜 혼자 노는 것을 좋아하는지 이전보다 잘 이해하기 되었다고 말하는게 더 맞으려나? 이전까지는 혼자 놀기를 잘 한다는 것을 특별한 장점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나의 특징 중 하나라고 여겼는데, 이제는 장점으로 소개할 수 있을 것 같다.
4/ 배달 음식을 최소화 하기로 했다. 지역 특성상 배달 음식을 시켜 먹기가 어려워서 거의 대부분의 식사를 아예 외식을 하거나, 하나로마트에서 장 봐온 음식으로 직접 해먹었다. 서울에서는 일에 치이며 바쁘기도 하고, 여의도 한복판에서 주문해 먹을 음식이 넘쳐 나기 때문에 요리를 거의 하지 않았다. 이번에 강제로 한 달간 부엌에서 복닥복닥 무언가를 만들어보면서 생각보다 재밌고 보람 있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서울에 도착해서 1주일간 배달 음식을 거의 먹고 있지 않다. 대신에 쿠팡 프레시로 식재료를 준비하고, 간단하지만 가정식을 해먹고 있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생각들이 있었는데 계속 살아가면서 떠오를 때마다 좀 더 풀어서 이야기 해보고 싶다.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고, 기대보다 의미 있었으며, 놀랍도록 행복한 한 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