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물 돋기를 기다리는 시간
야트막한 산자락 밑에 자리 잡은 우리 집 옆에는 우기 때만 물이 흐르는 와디 같은 실개천이 하나 있다. 그 작은 도랑을 건너가면 뱀이 기어가듯 좁다란 오솔길이 나오고, 그 길을 따라 한참을 더 올라가다 보면 그 길 끝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옹달샘 하나를 만나게 된다.
오래전에, 세상살이에 부딪히다 속 시끄러워 저서 마음의 빗장 걸어 잠근 채 두문불출하던 때, 누군가로부터 받은 상처가 너무 깊은데 치료방법을 찾지 못해 혼자 끙끙대던 때, 내가 즐겨 찾았던 곳. 생각의 목이 마르고 지혜의 목이 마를 때면 이 숲에 사는 노루나 토끼처럼, 다람쥐나 청설모처럼 찾아가 마른 목을 적시며 갈증을 해소하던 곳, 그리고는 샘물에 비췬 내 모습을 한참씩 들여다보며 생각의 매무새를 가다듬던 곳,
그러나 지금은 발길 끊은 지 오래된 곳,
오랜만에 용기 내어 다시 찾아갔는데 옹달샘은 온갖 잡목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웅덩이는 낙엽을 수북이 받아 안아 샘 형태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 곁에는 상수리나무가 여전히 비스듬히 서서 점점 사라져 가는 샘물을 걱정스레 들여다보고 있었고, 떠돌이 구름이 간간이 들러 어두운 안부를 묻고 지나갔다.
나는 마음 다잡아 먹고 팔을 걷어붙였다. 잡목들을 잘라내고 옹달샘을 가득 메우고 있던 침전물들을 걷어냈다. 탁해진 물들도 바닥이 보이도록 말끔히 퍼내 막혀있던 샘의 숨구멍을 열어놓았다.
샘 곁에 쭈그려 앉아 새 물이 돋기를 기다리는 시간
나는 버려지는 것들에 대해, 잊혀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한 때는 나를 충분히 흥분하게 만들고 내 삶의 전부인 것처럼 끓어 안고 끙끙대던 문학이라는 장르, 지금은 무연해졌지만 하루도 만나지 않으면 눈 짓무를 것 같던 사람들과의 인연, 아직도 여전히 그리운 고향, 마을어귀의 느티나무숲, 국민학교운동장 화단에 피 토하듯 붉게 피던 샐비어꽃, 한여름 연못 속에서 저 혼자 피고 지던 수련 등속...
지금의 나를 나이게 만들어 준 수많은 사물의 편린들, 하지만 지금은 이 옹달샘처럼 너무 오랫동안 찾지 않아 버려진 듯 잊혀가는 소중한 내 영혼의 옹달샘에 대해...
깨끗이 청소된 바닥에서 맑은 물이 퐁퐁 솟아올랐다. 떫은 풋감 속 물기가 달달한 홍시로 바뀌듯, 비릿한 풋고추가 맵고 아릿하게 매운맛을 채워가듯 새 물이 차올랐다.
바닥을 드러냈던 샘이 서둘러 물을 채우는 건 이 샘물에 얼굴 비추며 사는 상수리나무의 팔딱거리는 가슴과 간간이 들러 안부 묻는 떠돌이 구름들과, 꼬리가 길고 귀가 밝은 수줍은 갈증들이 이 숲에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제 깊이만큼 물이 차오르자 옹달샘은 다시 세상을 향해 조금씩 물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