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냥만 뀌어 주시오!
분야별로 가끔 고전을 읽어 보고는 한다. 세대 차이를 넘어 시대 차이가 있으니, 사용되는 단어의 차이는 둘째치고 하나하나 해석하면서 읽어야 하는 것도 있다. 그렇지만 고전은 오랜 기간동안 인정을 받은 책을 의미하며, '고전'의 저자는 한 명의 '고수'다. 박지원의 허생전을 보자.
허생은 거리에 서로 알만한 사람이 없었다. 바로 운종가로 나가서 시중의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누가 서울 성중에서 제일 부자요?"
변씨를 말해주는 이가 있어서, 허생이 곧 변씨의 집을 찾아갔다. 허생은 변씨를 대하여 길게 읍하고 말했다.
"내가 집이 가난해서 무얼 좀 해 보려고 하니, 만 냥을 뀌어 주시기 바랍니다."
변씨는
"그러시오"하고 만냥을 내주었다. 허생은 감사하다는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 변씨 집의 자제와 손들이 허생을 보니 거지였다. 실띠의 술이 빠져 너덜너덜하고, 갖신의 뒷굽이 자빠졌으며, 쭈그러진 갓에 허름한 도포를 걸치고, 코에서 맑은 콧물이 흘렀다. 허생이 나가자, 모두들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저 이를 아시나요?"
"모르지"
"아니, 이제 하루 아침에, 평생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만냥을 그냥 내던져 버리고 성명도 묻지 않으시다니, 대체 무슨 영문인가요?"
변씨가 말하는 것이었다.
"이건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 대체로 남에게 무엇을 빌리러 오는 사람은 으레 자기 뜻을 대단히 선전하고, 신용을 자랑하면서도 비굴한 빛이 얼굴에 나타나고, 말을 중언부언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저 객은 형색은 허술하지만, 말이 간단하고, 눈을 오만하게 뜨며,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재물이 없어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해 보겠다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닐 것이매, 나 또한 그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다. 안 주면 모르되, 이왕 만 냥을 주는 바에 성명은 물어 무엇 하겠느냐?"
「허생전」박지원
1.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하고, 가난한 선비 허생이 매점매석으로 돈 많이 벌었다는 이야기로 당시 사회를 비판하는 박지원의 단편소설. 경영학을 전공하면서, 독점시장을 설명하기에 허생전은 더할나위 없이 최고다. 이보다 더 좋게 설명할 수가 없다. 그리고 기회를 포착하는 허생의 비즈니스 마인드는 가히 놀라울 정도다.
2. 허생과 변씨. 모름지기 을의 입장에서는 허생과 같아야 하겠고, 갑의 입장에서는 변씨와 같아야 하겠다. 그야말로 자신감이고, 배포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