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니코스 카잔차키스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 해보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하고 있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 해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그리스인 조르바」中 니코스 카잔차키스
크레타 섬의 조르바와 두목(서술자). 두목은 책을 좋아하며 사색을 즐긴다. 거기에다 금욕적인 불교신자, 이상주의자까지 한국으로 따지면 꼬장꼬장한 그리스판 '선비'라 보면 되겠다. 그리고 전형적인 행동파 사나이 조르바. 이 정반대의 두 사람이 갈탄 광산을 경영하며 벌어지는 이야기.
조르바는 크레타로 가는 배에서 두목이 갈탄 광산을 개발한다는 소리에 대뜸 '무조건 나를 데려가시오'부터 걸리적 거려서 검지 손가락을 잘라버린 것, 비공식 결혼이 3천번은 족히 된다는 자신감은 물론, 과부들을 대하는 태도까지 그야말로 '자유로움의 결정체'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망나니와 소심남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일지 모르나, 작가 카잔차키스는 스스로의 삶을 비추어 소설 속의 '두목'으로 자신을 표현했고, 조르바의 말에는 뼈가 있다.
1. Seize the day, Carpe Diem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이 많아졌다.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TED', 그리고 각종 팟캐스트까지. 그리고 이 다양한 플랫폼의 강연에서 반드시 한 번은 듣는 말이 있다.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고 계십니까?"
"지금 행복합니까?"
사실 이젠 좀 따분하지만, 그래도 행복이란 추상적인 무언가를 위해서는 반드시 물어봐야 할 질문이다. 내 멋대로지만, '행복하다'는 것은 '후회가 얼마나 많은가'에 반비례한다고 생각하고, '후회'라는 단어를 키워드로 잡고 이야기하자면, 조르바에게 '후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매 순간순간 소위 말하는 '꼴리는대로' 행동하고, 설령 좀 잘못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순가'하는 식이다. 말하는 것만 봐도 성격도 겁나게 쿨하다. 그야말로 카르페디엠이고, 매 순간을 즐기는 삶의 방식이다.
반면에 '두목'은 조르바와는 정반대다. 불경책에 얽매여 끊임없이 책만 보고 끊임없이 이상을 좇고 있으나, 언제나 그랬듯이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다. 책을 읽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책만 읽는 것은 후회를 만든다. 행동하지 않으니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게 되고,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으니 후회할 것도 없다. 그래서 두목에게 '후회'란, 잘못된 행동에 대한 반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시도하지 않은 사실에 대한 후회다.
고등학교때 배운 수학의 아이디어를 잠깐 빌려 두 사람을 비교하자면, 우선 시간을 x축에 행복을 y축에 놓는 인생의 그래프를 생각하자. '두목'은 나중의 깨달음이라는 높은 기대값을 가지기 위해 그 중간단계를 낮은 값으로 들고가는 그래프를 연상시키지만, 조르바의 것은 그 함수를 미분한 것의 기울기가 중요한 삶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현재를 즐기라"는 말은 '인생'이라는 덩치 큰 유량변수에서 저량변수인 '순간'을 즐기라고 하는 것이고, 따라서 미분개념이 필요하며 "Carpe Diem"이니 "Seize the day"니 하는 말은 조르바의 삶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래프의 y값, 그러니까 행복수준이 끊임없이 증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가우스 함수를 떠올려보자. 구간을 나누면 기울기는 유지할 수 있다.)
2. 조르바와 법정스님
버리면 버릴수록 나를 옭아매는 것이 줄어들고 곧 자유로워 진다고 했다. 굳이 무언가를 덧붙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니오,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의 그것과 다를지도 모르지요.
그래요, 두목, 당신은 긴 줄에 매여 있습니다.
당신은 그 사이를 오고 가면서 그걸 자유롭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니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은 자르지 않으며..."
"언젠가는 자르게 될 거요."
내가 오기를 부렸다. 조르바의 말이 내 상처의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두목, 그건 당신에겐 불가능해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려면 단순해져야 합니다.
아시겠어요? 당신이 가진 모든 걸 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겐 좋은 머리가 있으니까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요.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을 않고 꼭 비상금을 남겨 둡니다.
그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
아니, 자르다니요!
오히려 더 붙잡아 맬 뿐이요,
그 멍청한 놈은!
줄을 놓쳐 버리면 머리라는 멍청이는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합니다.
그러면 모든 게 막을 내리는 거지.
그러니 인간이 이 줄을 자르지 못한다면 살 재미가 뭐 있겠소?
노란 카밀레 맛이지.
멀건 카밀레 차 말이오.
럼주 같은 맛이 나야 하는데 말이오.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
3. A man needs a little madness
비탈을 내려가면서 조르바가 그런 것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나를 돌아다보았다.
나는 그의 눈빛에서 가벼운 놀라움을 읽을 수 있었다.
이윽고 그가 물었다.
"봤어요? 두목, 돌멩이는 비탈에서 다시 생명을 얻는 군요."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놀라운 기쁨을 느꼈다.
나는 생각했다.
위대한 사상가와 위대한 시인도 이런 식으로 사물을 보지 않던가!
매사를 처음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매일 아침 그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게를 본다.
아니, 그저 보는 게 아니라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다.
이 무지한 일꾼은 글을 쓸 때면 펜을 우악스럽게 부러뜨린다.
처음으로 원숭이 껍질을 벗은 원시인처럼,
혹은 위대한 철학자처럼 그는 인간의 원초적인 문제에 몰입한다.
조르바는 이들 문제를 눈앞에 닥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는 어린 아이처럼 모든 사물을 생소하게 느낀다.
그는 항상 놀라고 이유와 동기를 알기 위해 질문을 던진다.
모든 것이 그에게는 기적으로 다가온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나무와 바다와 돌과 새를 보고도 그는 경탄한다.
"도대체 이 기적은 무엇인가요?"
"이 모든 신비가 왜 일어나는 겁니까?"
"나무, 바다, 돌 그리고 새의 신비는 다 무엇입니까?"
「그리스인 조르바」中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쯤되면 거의 '긍정적 사고'의 끝판왕 격이고, '무위자연', '상선약수' 등을 비롯해서 내가 아는 모든 행복해지는 법을 총망라한 사람이라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굉장히 패턴화되고 기쁨조차 획일화된 방법들을 통해서만 누리는 것이 아닌, 인생 국면의 단순하고 말초적인 것에서도 새로운 것을 보는 그런 태도, 그리고 '낮선 것'을 대하는 자세 말이다. 버트란트 러셀이 '행복의 정복'을 통해서 말하고자 했던 '열정'도 아마 조르바의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러면 항상 강연에 나오는 사람들이 저런 질문을 던지고, 하고 싶은 일 하라며 외치지만, 그게 쉽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짧은 생각으로는 일반적으로는 '성실한 아들', '충실한 직원', '든든한 아빠' 등 사람들에겐 한 개 이상의 사회적 역할이 정해져있고, 역할을 놓아버리기엔 위험부담이 너무나도 크기에 그런것이 아닐까 한다. 누구나 조르바가 될 순 있지만, 아무나 쉽게 조르바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사회적 역할을 잘 내면화한 사람들 중에는 조르바 보다는 두목이 더 많을 거다.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고 하고싶은 일을 찾아나서는 건 하나의 '일탈'로 여기지 않는가. 물론 그런 용기에 우리는 박수를 보낸다만.
그럼에도 현실적인 맥락에서 '그리스인 조르바'의 의미를 찾는다면,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모토로 삼는 'Carpe diem'도 함께 생각한다면, 꼭 조르바처럼 살지는 못하더라도 '이것만은 꼭 해야겠다'하는 때로는 광기어린 '용기', 그리고 눈치보지 않고 뜻대로 행동하는 '용기'를 가져야 하겠다.
완전히 내향적인 사람은 없듯이, 완전히 외향적인 사람도 없고, 그래서 누구나 새로운 일,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람을 맞이할 때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기대 반, 두려움 반'이라 했던가. 그치만 나는 기대보단 두려움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사람 중의 하나다. 그래서 새로운 무언가를 할 때면 항상 떠올렸다. 여태껏 그래왔듯이 지나고 나면 별 것 아니더라. 심지어 지난주 혹은 지난달에 무엇 때문에 고민했는지 조차 잊어버리는 경우도 많지 않나. 이따금씩 꺼내서 '이렇게 사는 놈도 있는데, 조금만 덜 팍팍하게 그리고 재밌게 살자'하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자기계발서의 최고봉인 '데일카네기 인간관계론'을 보면, 책 내용을 시작하기 전에 "이 책을 매달 읽으면서 꾸준히 책의 내용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라"고 써놓았다. 주변에 조르바같은 사람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한 달에 한 번, 혹은 분기별로 한 번씩 다시 꺼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