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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 Apr 05. 2016

인문학이 밥 먹여 주더냐

밥은 아니더라도 반찬까진 주는 것 같던데요

인문학 하면 뭐가 떠오를까. 아무래도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을 공부하자는 말들 보다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아졌다. 역시나 아쉬운 점을 꼽자면, 인문학 서적들 보다는 이 트렌드에 어떻게 올라타서 또 한번 책을 팔아볼까 하는 작가들이 판을 친다는 것. 인문학이 강조되고, 취업에서도 인문학적 소양을 보겠다고 하는데, 정작 팔리는 책들은 인문 서적들보다는 '인문학을 왜 읽어야 하는지', '인문학을 읽으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그럼 인문학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담은 책들만 주구장창 베스트셀러 팻말 아래 놓여져 있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 즈음, "아! 인문학을 하긴 해야겠구나"하는 데 까지가 전부다.


주제와 다른 이야기를 했다. 돌아가서, '인문학이 밥먹여 주더냐'라는 말을 한다. 맞는 말인 것 같다. 적어도 글쓰기가 주된 업이 아닌 나에게 있어서 인문학은 밥은 커녕 책값만 비싸다. 물론 인문학이 밥 먹여주는 직업들도 있긴 하지만(요즘엔 플랫폼이 굉장히 다양해져서 인문학이 밥먹여주는곳이 좀 많이 생긴 것 같기는 하다), 그래도 일반 직장인들이 소설 깨나 읽었다고 승진하는 경우를 보긴 힘들고, 인문학적 소양을 보겠다고 하지만 철학공부 좀 했다고 취업시켜주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메인으로서의 역할보다는 사이드의 역할이란 생각이다.


지식인의 서재, 광고인 박웅현의 잠시 빌리면,


삶을 대하는 촉수라고 생각해요. 저는. 지금 제가 얘기하는 인문은. 그러니까 '평범하기 짝이 없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속에서 가슴의 울림판의 울림을 가져올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인문적인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예요. 저는. 그러니까 그런 면에서는 어떤 일을 하건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서 인문적인 훈련은 되게 중요하다라는 거죠. 그 인문적인 훈련을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촉수를 만드는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카잔차키스입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나는 온몸이 촉수인 동물이 되고 싶다'라는 얘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이 단순히 그 시각만이 아니라, 시각, 청각, 후각 다 포함해서 똑같은 멜론을 만져도 이 멜론을 만지는 이 손이 더 민감하고. 뭐 똑같은 와인을 마셔도 그 와인을 소믈리에처럼 더 예민하게 볼 수 있고. 똑같은 바람을 맞아도 이 바람이 축복인지를 알 수 있고. 똑같은 계절의 변화를 겪으면서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인문적인 촉수가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그게 생활의 인문적인 태도 같고요. 그런 면에서 저는 인문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고 그렇게 본다면 자명하죠. 인문이 왜 중요하냐?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니까 중요한 거죠. 그래서 이게 더 제일 쉬운 예 같은데, 어느 라디오 방송에서 '인문학을 하면 밥이 나옵니까?'라는 짓궂은 질문을 뭐 4728님이 물으셨습니다. 하며 물었어요. 그래서 제가 했던 답이 뭐냐하면 "인문학을 해서 밥이 나오는 직업도 있고 그렇지 않은 직업도 있다. 근데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인문학을 하면 밥이 맛있어진다."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인문적인 촉수가 생긴 사람들은 똑같은 24시간을 더 풍요롭게 산다는 얘기거든요. 그게 '이 인문의 의미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선 밥은 알아서 좋은 걸로 퍼야 하겠다. 그리고 하나의 테이스트는 하나의 반찬이 되는데, 독서는 그런 테이스트를 만들어낸다고 보면 될 것 같다. 하나의 값진 경험은 하나의 변수를 만들어내듯 독서도 다차원의 테이스트를 이끌어 내는 하나의 방법이란 생각이다.
생업에 종사하며, 휴일에는 잠만 자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매일새벽 아침 별을 보며 출근하고, 다시 별을 보며 퇴근한다. 직장에서는 휴식을 갈망하고, 주말에는 다음주의 출근을 걱정하며 휴식하는 이의 머리 속에는 양 쪽의 끝이 일과 휴식인 1차원 직선적인 사고가 존재한다. 휴식은 좋은 것, 일은 나쁜것이며, 다른 것들은 감히 끼어들 틈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독서에 취미를 가진 다른 사람을 보자. 앞서 나온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며 '남자라면 조르바처럼!'를 떠올릴 때도 있고, 이따금씩 니체를 보면서 세상은 넓고 x라이는 많다고 느낄때도 있다. 그에게 한 권의 책은 혼자만의 사색, 때로는 친구와 나누는 대화의 재료가 되고, 다른 이가 '좋다-안좋다'의 직선형태의 감정을 가졌다면, 그는 '하늘땅만큼 좋은 감정'과 때로는 '밤하늘의 별을 따 줄만큼 좋은 감정'을 비롯한 훨씬 넓은 감정의 스펙트럼을 가진다.



이처럼 인문학의 가치는 어쩌면 알파고를 당황시킨 이세돌의 대단한 '직관'을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조금 더 현실적인 인문학의 가치는 '동일한 상황, 동일한 장면을 맞닥뜨렸을 때 이전과는 달리 다양하게 반응할 수 있는 일종의 해석 툴을 가지는 것'에 있을수도 있다는 생각. 색감이 다채로운 물감을 가졌을 때 훨씬 다양한 색을 표현하고, 볼링 깨나 쳤다는 사람들이 스패어 볼을 따로 준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독서가 적당하지 않다면, 굳이 독서를 고집해야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는 생각도 있다. 인문학이라고 해서 꼭 독서만 떠올리진 않았으면 좋겠다. 친구와의, 연인과의 대화를 통해서든, 미술관에 전시된 한 폭의 추상화를 통해서든 '삶에 대한 깊이있는 관심, 인간다운 삶에 대한 열망'을 얻을 수 있으며, 사실 거기까진 아니더라도 평소에 하지 못했던 생각들을 맞이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지 않겠나. 그리고 독서는 그것을 위한 하나의 좋은 도구일 뿐이고, '사람책'이라고 해서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나의 책을 대하듯 하는 프로젝트도 있다.


그래서 나는 어디까지나 반찬으로서 인문학을 대해야 하겠다는 생각이다. 인문학 서적을 읽음으로써 어떤 능력을 얻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답이 없다. 그냥 재미있으니까 보는 것이고, '이런 것도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보는 거지, 이걸 무슨 시대적 요구로 과대포장해서 '독서를 하지 않으면 곧 도태될 것이다'식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제는 좀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힐링을 표방하면서 '힐링'이라 적힌 책을 읽지 않으면 않될 것같은 그런 분위기를 조장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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