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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삼분의 일쯤 걸어가면 나오는 대로변에 술집이 하나 생겼다. 몇 달을 지켜보기만 했다. 가게 이름은 지극히 한국적이고 전통적인데 메뉴는 전혀 전통적이지도 한국적이지도 않아서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 지켜보기만 했다. 무엇보다 드나드는 손님이 얼마 없었는데, 사실 그 점이 가장 좋았지만 또 멈칫거리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한 번은 가야 할 술집이었기 때문에 과감히 들어갔다. 채워져 있지만 비어 있는 느낌의 인테리어를 헤치고 2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에 앉은 다음 약간 초조한 마음으로 메뉴판을 기다렸다. 종잡을 수 없는 메뉴 가운데 가장 무난해 보이는 고추장 짜글이와 소주를 주문했다. 기본 안주와 -아마도 어묵 튀김- 소주를 먼저 내주었다. 요리를 기다리는 동안 목을 축일 수 있게 술을 먼저 내주는 술집이 좋다. 들어올까 말까 망설이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낯선 공간과 인사를 나누고, 이 시간이면 오는 전화나 메시지도 없지만 공연히 한 번 확인하면서 본격적인 음주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때문이다.
참이슬 오리지널을 구비해 두는 술집은 흔치 않아서 주류 목록에 참이슬 오리지널이 없어도 그러려니 하는데, 아무래도 기다리는 음식이 고추장 짜글이다 보니 참이슬 오리지널이 못내 아쉬웠지만, 고추장 짜글이가 빨간색이니까 괜찮다고 되지도 않는 끼워 맞추기를 하는 동안 음식이 나왔다. 버너는 제법 귀여웠지만 고추장 짜글이의 맛은 전혀 귀엽지 않았다. 맵다는 얘기가 아니라 '아, 맛있네'하고 생각할 만큼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게다가 생각보다 양이 많아서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혼자 먹기에 양이 많아도 맛있으면 못다 먹는 게 미안하지만 맛이 수월찮으면 부담스럽다. 그래도 고추장 짜글이는 나름 구색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소주는 술술 들어가고, 술술 들어가는 소주를 따라 고추장 짜글이도 넘어왔다. 그럼 됐지 뭐. 세상 모든 음식이 맛있기만 할 수는 없는 거니까.
기대한 만큼 맛있지 않다면서 소주 한 병을 더 시켰다지. 호로록호로록 고추장 짜글이를 먹으면서 하고 싶고 해야 하는 작업을 생각하느라 야심 차게 노트도 꺼냈다지. 틈만 나면 노트에 뭔가 적는 것을 좋아하던 때가 있었는데 스마트폰 메모장에 뭔가 적는 일이 더 많아졌다. 그래서 스마트폰 메모장에 뭔가 열심히 적고 있다 보면 어쩐지 '나 게임하는 거 아니거든!'하고 투덜거리게 되는데, 노트에 뭔가 적을 때는 사각거리는 펜 소리만큼 더 진심이 담기는 것 같아 '노트에 적자'고 다짐을 해 봐도 열 번에 아홉 번은 스마트폰 메모장에 기록한다.
기억에 남는 첫 번째 생일 선물은 7세에 사촌 오빠에게 받은 노트였다. 그 노트에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니미럴, 글 지어다 밥상 차리는 길로 들어섰다고 생각한다. -니미럴, 세 글자에는 빛나는 문장을 위해 혹독하게 몰아세웠던 시간과 그렇게 혹독한 시간을 보내고도 빛나는 문장을 만나지 못했다는 오기와 이야기를 향한 욕망과 무엇에든 쉽게 관심을 갖지도 오래도록 하지도 못하는 나란 사람이 7세 이후 지금까지 징그럽게도 놓지 못하는 일이 글 쓰는 일이고, 글 지어다 밥상 차리는 일을 놓지 않고 있는데 대한 자부심과 회한과 기타 등등이 꾹꾹 눌러 담겨 있다- 그 후로 질풍노도의 10대를 보내고 20대를 맞이하는 동안 각양각색의 노트를 쓰다가 몰스킨에 정착한 것은 '있어 보이는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일정한 규격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따금씩 나오는 스페셜 에디션을 겟하는 재미도 쏠쏠하고. 지금 쓰고 있는 몰스킨은 일곱 번째 버전이다. 쓰고 보니 공교롭다. 7세 생일 선물, 일곱 번째 몰스킨, 그냥 아무 의미 없이 공교롭다.
이맘때쯤 혼술의 재미를 알게 된 것 같다. 홀가분하고나, 낯선 공간도 편안할 수 있고나,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에 술을 곁들이니 이만한 풍류가 없고나, 무엇보다 먹기 위해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고 먹고 마신 뒤 설거지를 하지 않아도 되니 더할 나위 없이 좋고나. 이러니 내 술을 못 끊지. 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