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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윤 Jan 01. 2020

<풀잎들> 깊은 가을처럼 서늘한 인생의 본질

2018 BIFF 상영작 리뷰


여전하고도 새롭다, 그의 스물두 번째 영화이자 네 번째 흑백영화는. 특유의 리듬과 반복을 보이며 자유자재의 변화를 구사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인물 간의 역동적인 상호작용 에너지를 충만하게 담아내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재미와 아슬아슬함 또한 여전하다. 그럼에도, 매 작품이 같은 자리에 머무르는 법 없는 홍상수 감독의 신작은 이번에도 전작들과 사뭇 다르다. 더 깊어지고 무거워졌으며 인간의 본질과 죽음에 대한 예리한 통찰로 번뜩인다.

서울의 어느 깊숙한 골목에 위치한 카페에서 손님들은 각자의 테이블에 하나둘씩 앉아 대화를 나누거나 홀로 노트북 화면을 마주한 채 글을 쓴다. 클래식 음악이 장중하게 깔린 가운데, 배우 정진영-김새벽, 안재홍-공민정, 기주봉-서영화가 각자 대화의 장을 펼친다. 공교롭게도 정진영, 안재홍, 기주봉이 연기하는 극 중 인물의 직업은 배우이며, 대화가 교착점에 봉착할 때 이들은 홀로 카페 문을 열고 나와 담배를 피운다.

분명 각자가 별개의 인물임이 분명하나, 인생이라는 시간을 ‘배우’라는 직업으로 관통하기 시작한 / 관통 중인 / 오랜 시간 관통해낸, 청년 / 중년 / 장년의 남성이 영화 속 어느 시점에 같은 지점을 점한 채 비슷한 포즈(화분에 심어진 풀들을 내려다보며 씁쓸한 표정을 머금고 담배를 피우는)를 보이는 모습에는 어딘가 기시감이 스며있다. 마치 그 모습에, 고대 스핑크스의 질문에 대한 감독의 답이 담겨있는 듯.

‘아침에는 네 발로, 점심에는 두 발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스핑크스의 물음에, 한낮의 존재, 저물어가고 있는 오후의 존재, 어스름이 이미 짙게 깔린 저녁의 존재를 하루라는 시간 속에서 동시적으로 존재시켜 보여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게다가, 이들 모두는 ‘배우’이고.

보는 이(관객)에게 보이는 자는 모두 ‘배우’인 것이 인생이라고 한다면, 우리 모두는 인생의 여러 장면 속에서 누군가에게 보이고 들리고 있으니 그것을 의식하며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 또한 배우이며, 한편으로는 주위의 존재들을 보고 듣는 관객일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제대로 보고, 정확히 들으며, 온전히 아는가? 베르그송은 인간이 두 눈을 가졌기 때문에 오히려 장애를 안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한정된 시야로 일정한 거리의 대상 만을 볼 수 있는 인간의 한계를 지적한 말이리라. 이렇듯 좁은 시야에 갇혀 있고, 한정된 시간성에 갇혀 있으며(우리는 과거, 미래에 동시 존재할 수 없고 현재라고 하는 한 시점만을 살아갈 뿐이다), 한 번에 한 공간에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니, 그 시야와 인식에 엄연한 한계가 지워질 밖에.

그러한 인간의 한계와 어리석음을 홍상수의 카메라는 끊임없이 일깨워준다. 한 번에 모든 공간을 조망하는 법 없이, 두 사람의 공간에 집중하던 카메라가 돌연 이동하면 방금 전까지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공간과 사람들이 (마치 마법처럼) 나타난다. 그리고 그가 포착하는 인간의 언어 또한 얼마나 미완성인지. 어딘가 한 조각 잇새가 빠진 듯 혹은 군데군데 퍼즐이 빠진 듯한 인물들의 대사는, 제대로 말해질 수 없고 정확히 전달될 수 없는 저마다의 의도와 감정을 반영하는 듯하다. 분명 듣지만 제한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기에, 우리(관객)는 나름의 해석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 발생하는 오해와 왜곡은 때때로 필연적이다.



언제나 다 보지 못하고 정확히 듣지 못하며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을, 환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영화 속 관찰자인 아름(배우 김민희)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유일하게 아는’ 소크라테스적 구도자이며 감독의 페르소나에 가장 가까운 인물로 보인다. 그녀는 끊임없이 엿보고, 엿듣고, 돌아보며, 들여다본다. 다만 (아직은?) 모른다는 것만을 알 뿐이기에, 그녀는 확신하지 못하는 프루프룩처럼 방황할 뿐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자 특유의 냉소와 불안이 우연한 계기로 그녀에게서 터져 나올 때, 그녀가 주위 사람들을 관찰하고 해석하듯, 화면 밖에서 그녀를 지켜보는 우리 또한 그녀의 히스테릭한 인간적 한계에 피식 웃음 짓는 장면이 연출된다.

수백 년을 ‘살아남은’ 클래식 음악이 카페 안에서 웅장하고 힘 있게 깔릴 때, 지금 살아있는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오히려 덧없는 ‘소음’이나 ‘잡음’처럼 와 닿는 순간이 있다. 그토록 "점잖고 사람 좋은" 카페 주인은 영화 속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이 세상에 다시없을, 고결한" 교수는 죽고 없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최고 멋진 사건"연애를 하고 있다는 여인은 그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계단만 오르내린다. 이 세상 모든 좋은 것은 우리의 시야에 ‘부재’하고, 인물들은 그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그래서 그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다.

그 자신의 반경에서 잠시 머물다가 불현듯 죽음이 오면 갑자기 사라질 존재. 허나 그것을 생의 대부분 망각한 채 시시각각의 바람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존재. 열매와 꽃송이를 남기지 못하는 풀잎처럼 그 어떤 존재의 증거나 의미도 남기지 못하고(어쩌면 애초에 찾지조차 못하고) ‘존재’와 ‘부재’의 이분법적 극단을 단 한번 지나가는 나약하고 불확실한 인간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 엿보이는 엔딩 시퀀스는 가슴을 한껏 서늘하게 한다.
겨울을 예감하는 깊은 가을, 소주 한 잔이 주는 알싸한 쓴 맛과 변덕스런 감성의 고양, 잠시 동안 찾아들 덧없는 달콤함을 갈증 나게 하는 서늘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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