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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윤 Oct 26. 2019

<아워 바디> 다만 달린다는 과정만이

[2018 BIFF 영화 리뷰]

나는 내가 읽지 않은 필독도서,
나는 나의 죄인 적 없으나 벌이 된 사람이다. (...)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 자주 상상한다.
나는 나에게서 당신만큼 멀리 떨어져 있으니
내가 아무리 나라고 해도
나를 상상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상상하는 사람, 그러나 그것이
내 모습인 것이 이상하여 자꾸만
당신의 상상을 빌려오는 사람이다.
ㅡ김애란의 소설 <영원한 화자> 중에서


건실한 주위 조언과 나를 아끼는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며 열심히 살아왔을 뿐인데, 어느샌가 내가 나로 사는 것이 고역이 되고 급기야 살아있다는 실감도 들지 않게 된 인물, 자영(최희서). 8년째 행정고시 공부만 해오던 어느 날 깨닫는다. 자신이 사람처럼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쩌면 죽어있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자기 ‘내면의 목소리’는 커녕, ‘몸의 기본적인 요구’에도 제대로 귀 기울인 적 없던 자영에게 당장 시급한 것은 ‘삶을 되찾는 것’이다. 하지만, 방법을 모른다. 망연자실하여 주저앉은 육교에서, 우연히 조깅 중이던 현주(안세희)의 생명력 가득한 육체를 마주하고 강한 부러움과 동경을 느낀다. 그리고 달리기를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그런 그녀의 첫 행동이 웃프다. 인터넷 검색과 유튜브 영상으로 달리기를 ‘지식’으로 익히려 한다. 핸드폰에 매달려 달리기에 대해 학습하던 중, 잠시 고개를 들었을 때 자유롭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도 한 때는 아무 준비나 학습 없이 건강하고 즐겁게 달릴 수 있는 존재였다.

다행히 본인의 의지와 현주의 도움으로 그녀의 일 단계 미션(몸의 생존)은 성공한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시작에 불과할 뿐, 정말 어려운 문제가 주어졌다 : 제대로 사는 것.



그런데 산다는 것이 여간 아리송하지 않다. 누구에게나 한 번 주어지기에 앞선 생들의 ‘기출 분석’도 무의미하고 '산다'는 것은 계속적인 과정인지라 중간평가도, 그 결과에 일희일비하는 것도 덧없다. ("~하게 살았다"는 최종 평가는 인생이 종료된 후에나 가능한 일이니까.) 이 끊임없는 '살다'의 과정 속에서 '살아 있음'을 느끼며 ‘제대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영은 엄마에게 묻고 (엄마는 얼마나 오래 달려봤어?) 현주에게 묻지만 (넌 달리면서 무슨 생각해?) 그 질문은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온다 : "넌 달리면서 무슨 생각하는데?" 그것은 애초에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했고, 스스로 답해야 하는 질문이었다. 러닝메이트도 있고 주위의 따뜻한 응원도 있다면 좋겠으나, 인생이라는 오래 달리기에서 우리는 다만 스스로의 기초체력과 나름의 전략에 기대어 달릴 수 있을 따름이다.



더구나, 노력한 만큼 정직한 결과가 돌아오고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때로는) 내 ‘몸’ 밖에 없는 세상을 살아내려면, 매우 강인한 에너지와 정신의 면역력이 필요하다. 그것을 득하는 첫걸음은 인생의 주체인 '나'를 정확히 고 받아들이는 것. 동경하는 ‘그녀’와의 동일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녀에 대한 이해’이고 이를 ‘연대’로 이어갈 순 있겠으나, 이것이 내 인생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순 없다.

종착점(죽음)을 향해 멈춤 없이 나아가는 저마다의 여정이며, 그 고유한 일방통행의 고비마다 마주하게 되는 인생의 까다로운 문제와 질문 앞에서 우리는 때때로 당혹스럽겠지만.. 인생이 던지는 질문도, 대답을 찾는 고통도 없는 시간이란 오직 죽음 후에나 찾아오는 것일테니.. 끊임없는 '고뇌와 탐구의 시간'이야말로 ‘내가 지금 살아있는 증거’ 다름없지 않을까.

자영은 ‘자기 탐구’와 자신의 ‘인생 탐구’를 이제 막 시작했다. 아직 에너지도 부족하고 기술도 서툴지만,  발 단단히 에 딛고서 온전한 자기 이해를 향해 세상 속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서든 누구나 그럴 것이다.
모든 순간이 자신의 단 한 번 생(生)에서

처음 맞이하고 처음 겪는 순간이다.

언제나 첫 시작, 새로운 탐구의 출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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