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상황에 맞게 다양한 선택지를 건네주는 사물
펜과 종이로 무언가를 쓰는 행위 자체를 좋아한다. 학창시절에는 교과서에 필기를 했고, 회사생활을 하는 지금은 TO DO 리스트를 정리한다. 매일 다이어리에 기록을 남기고, 이따금씩 편지를 쓰기도 한다.
어느날 카페 책장에 놓여있던 잡지 <핑거프린트>를 우연히 발견했다. 격월간 <핑거프린트>는 '일상생활의 사물'을 주제로, 매호 사람들의 삶과 경험, 지혜와 추억을 담는 '사물학 잡지'였다. 내가 집어든 건 '펜'을 주제로 한 1호였다. 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문구 브랜드도 등장하니 더 반가운 마음으로 한장씩 넘겨나갔다. 그중 사다리타기 형식으로 나의 문구 성향을 테스트해보는 섹션이 있어 남자친구와 함께 해보았다.
남자친구는 주체적 개성파, 나는 너그러운 실용파였다. 남자친구는 한 주가 시작되기 전 일요일, 그 다음주 계획을 정리한 종이 한 장을 지갑 또는 옷 주머니에 지니고 다닌다. 요즘에는 노션으로 할일 정리를 하곤 하지만, 확실히 필기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펜 종류를 크게 따지지는 않고, 자신한테 맞는 펜 하나를 갖고 다니는 편이다. 반면 나는 '너그러운 실용파'에 대한 설명처럼, 선물 받은 펜에서부터 무료로 받은 판촉용 펜까지 여러 펜의 기능을 탐구하는걸 즐기는 편이다. 낯선 문구를 만날 때의 즐거움을 좋아하는데, 내 손에 맞는 펜을 발견하는 즐거움은 더 크다. 사물을 내 손에 길들이는 과정 또한 소중하다.
펜은 언제 어디에서나 흔히 접할 수 있는 사물이다. 무심결에 집어 든 펜을 종이에 갖다대면 펜은 언제나 제기능을 다한다. 하지만 종이의 질감, 쓰는 상황에 따라 내가 선호하는 펜은 달라진다. 객관적인 질의 차이도 있겠지만, 나만의 주관적인 기준에 따라 손에 쥐고 싶은 펜은 그때그때 다르다. 내 책상 위, 필통 속에 있는 필기구를 몇개 소개하고 싶다.
내가 애정하는 필기구 중 하나인 카웨코 스포츠 클래식 펜슬. 골드 색상의 로고, 클립과 잘 어울리는 그린 컬러로 구매했다. 3.2mm 흑연 홀더심이 함께 들어있는데, 두께가 다소 두꺼운 편이어서 어느 정도 단단하고 큰 종이에 사용하면 좋다.
카웨코는 1880년대 창립된 독일 필기구 브랜드다. 지금은 파산한 회사지만, 펜과 펜슬처럼 아날로그적인 사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또 중요시하는게 빈티지함이기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카웨코 제품을 찾고 있다. 카웨코 스포츠 라인의 연필심 홀더는 팔각처리로 쉽게 미끄러지지 않고, 플라스틱 소재로 가벼워서 휴대하기 편하다. 이 복각펜의 원형은 1920년대 중반에 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카웨코 스포츠 라인은 1972년 뮌헨 올림픽 개최 당시 공식 펜으로도 지정되었다고 하니, 기록이라는 행위에 위대함이 담기는 기분이다.
라인에서 근무할 때, 라미와 라인프렌즈가 콜라보한 브라운 만년필을 구매했었다. 만년필을 손에 익히려고 했는데 아직은 서툴다.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해서 고이 모셔두고만 있는 제품. 만년필은 차근차근 알아가야겠다. 하지만 브라운이 달린 디자인이 너무 귀엽다.
파인테크의 가장 큰 장점은 가격이다. 일본 하이테크 가격의 3분의 1 정도인데 기능적으로는 오히려 더 낫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직접 두 가지를 사용해본 나도 두 제품 간 차이를 못 느낄 정도로, 동아 파인테크는 가성비와 성능 모두 만족하는 펜. 올해용으로 구매한 다이어리에 가장 적합한 펜을 고민하다가, 다이어리를 제작한 브랜드 대표분께 따로 메시지로 몇가지 질문을 드렸다. 너무 친절하게 답변해주신 덕에, 다이어리 종이 두께가 얇다는 점 그리고 나도 글씨가 작고 쓰는 속도가 느리다는 점을 고려해 파인테크 0.25를 구매했다. (파인테크 0.3도 최근 구매해서 써보니 괜찮았다.)
다시 독일 제품이다. 1830년대 창립된 문구 기업 스테들러는 아마 내가 갖고 있는 필기구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스테들러 피그먼트 라이너는 드로잉용으로 구매한 펜인데, 언제나 동일한 라인을 뽑아준다는 점과 필기감 때문에 만족도가 높다. 직접 테스트해보진 않았지만, 피그먼트 펜은 기본적으로 워터프루프 기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여행 드로잉 펜으로도 사용되기도 한다.
드로잉용 샤프가 필요해서 찾아보다가 고른 오토의 목재 홀더 샤프. 드로잉용이라 심 굵기가 어느정도 두꺼운게 필요했는데 2.0mm라서 잘 맞았다. 지우개는 장식용이라 쓸 일이 전혀 없다. 샤프 촉 부분이 연필처럼 깎여있는 점과 금속 장식이 마음에 든다.
일본의 대표적인 필기구 회사 파이롯트의 쥬스 업 라인은 파이롯트의 역작으로 불리기도 할 정도로 품질이 좋다. 나는 골드 색상 펜을 선물 받았는데, 펜이 종이 위에서 미끄러지는 듯한 필기감이다. 특히 검정색 종이 위에 쓰면 예쁘다. 이전에 검은 색상의 두꺼운 질감으로 된 생일카드를 이 펜으로 썼는데 너무 잘 어울렸다.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는 연필, 스테들러의 Mars ergosoft. Mars ergosoft는 150과 151 모델이 있는데 나는 151 점보 삼각연필을 구매했다. 점보연필이다보니 글씨를 처음 배우는 아이들도 많이 사용하는 듯하다. 전체적으로 무광 파랑색이고 연필캡 부분은 유광 검정색으로 되어 있다. 파랑색 부분을 손에 쥐면 고무 재질 같은 느낌이다. 이 연필은 드로잉용으로 구매해서 잘 사용하고 있다. 특히 요즘 같이 더운 날 이 시원한 디자인의 연필은 늘 갖고 다니고 싶게 만든다.
스마트폰 메모장에 쉽게 글을 쓸 수 있는 시대에, 나는 여전히 펜을 사고 펜으로 글을 쓴다. 나의 상황에 맞게 편히 고를 수 있도록 다양한 선택지를 건네주는 펜이라는 사물은, 늘 내 곁에 있다. 항상 함께 있어 당연하게 여기는 사물일수록 그 사물들의 생김새와 기능을 들여다보는 것, 나만의 취향을 좀더 알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노력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