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다"의 온도 변화
#1
“학생 전원 구조” 반쯤 바다에 잠긴 배. 안도하는 앵커의 목소리가 나오는 휴대전화 속 뉴스. 배를 둘러싼 또 다른 배, 그 위를 날아다니는 헬기.
거기까지였다. 중계를 끄곤 잠을 청한 내게 반쯤 잠긴 모습이 세월호의 마지막이었다. 2014년 4월 16일. 그날은 영화축제 자원봉사 팀의 장기자랑 뮤직비디오 영상을 밤새 편집한 날 아침이었다. 배의 이름이 ‘세월호’임을 안 것도 원룸 바깥세상이 뒤집어지고 난 이후였다. 세월호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뉴스 앵커 목소리는 다급해져있었으며, 구조를 위한 배에는 실종자 가족이 탑승해있었다. 그해 4월과 5월은 전국이 세월호를 추모했다.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5월 초 영화제 행사는 대폭 축소됐다. 밤새 편집한 장기자랑용 뮤직비디오도 끝내 상영되지 못했다. 영상을 찍고 편집하기 위해 팀원과 고생했던 것이 헛일이 됐다는 사실에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당시 내 “슬프다”라는 말의 온도는 그만큼이었다.
#2
“지금 노래가 나오나” 2014년 제헌절 기념행사장. 국회 앞 뜰에 마련된 좌석에 멀끔한 복장의 사람들. 그들에 소리치는 노란 옷의 무리. 이질적인 두 집단을 가르는 인간 바리케이트.
영화 <나쁜 나라>의 한 장면이다. 다큐멘터리인 이 영화는 4월 세월호 참사 이후 유족들의 삶을 보여준다. 영화 속 제헌절 기념행사는 섬뜩했다. 경계선 안과 밖은 극명한 대립을 이루었다. 안의 ‘초대된 사람들’은 바깥의 ‘초대되지 않은 사람들’을 외면했다. 아빠 무릎에 앉은 안쪽의 아이는 자꾸만 바깥을 흘끔거렸다. 그의 아버지는 아이의 시선을 애써 행사무대가 있는 앞쪽을 향하게 했다. 바깥의 노란 옷 입은 아이는 인간 바리케이트 틈을 비집어 안을 멀뚱히 쳐다봤다.
“기록팀은 이 기록을 정리하는 동안 한 사람을 생각하며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견뎌냈습니다. 10년쯤 지난 후에 이 책을 읽어주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책 <세월호, 그날의 기록>의 마지막 문장이다. 기록팀이 책을 바치는 대상은 세월호에서 구조된 권 양이다. 2014년 4월 16일 참사 당시 4층 세월호 내 키즈 룸에서 놀던 권 양은 “애기요, 애기!”라며 자신을 밀어 올려준 어른들 덕에 난간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기록팀은 권 양을 위해 수 만장의 기록을 검토하고, 697쪽에 달하는 책을 썼다. 책은 미주 50 페이지를 제외하곤 전부 사건 기록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미 배가 침몰한 지 20분이 지난 10시 52분, 해경 본청에 전화해 청와대는 “언제 뒤집어졌던가?”라는 말을 남겼다. 책 속 해당 문장에는 형광펜이 그어져 있고, 아래에는 ‘XX, 세월호는 10시 30분 선수만 남고 물에 잠겼다’는 내 메모가 적혀 있었다.
2015년 4월 16일을 맞아 본 영화와 책을 통해 무서운 진실을 마주했다. “슬프다”라는 말엔 1년 전과 달리 분노가 섞여졌다.
#3
‘디스코 팡팡 25% 할인권’ ‘안산시립도서관 도서 대출증’ X표가 4월 14일로 멈춰진 월간 식단표. ‘4월 22일 영어듣기평가, 4월 23일 학생회장 선거’라는 문구가 지워지지 않은 교실 앞 화이트보드.
2015년 단원고 명예 3학년 교실의 모습이었다. 책과 영화를 본 2015년 4월 16일로부터 이틀 뒤 안산 단원고를 찾았다. 유가족들은 ‘기억과 약속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매일 아이들을 추모하고 있었다. 출발 장소인 ‘4·16 기억저장소’는 빌라 상가 2층 자그마한 공간에 위치해있었다. 1층엔 떡집과 부동산이 있는 건물이었다. 4·16 기억저장소-단원고-합동 분향소를 따라 비를 맞으며 걸었다. 아이들이 생전에 남긴 물건들이 전시된 300여 개의 ‘기억 저장함’, 추모의 발길만이 닿아 쓸쓸한 명예 3학년 교실의 복도, 세월호에 나쁜 말하는 사람들과 더는 싸우기 싫어 “애들(유가족) 엄마들이랑 빈대떡이나 부쳐먹지”라고 말하는 합동분향소의 유가족들을 차례로 만났다.
그날 “슬프다”라는 내 말에는 대상이 생겼다. 304명의 학생들은 ‘7반의 누구, 6반의 누구’가 됐다.
다시금 세월호를 떠올린 건 어제 15일. 한 언론의 특집기사를 통해서였다. 참사로 숨진 아이의 방을 찾아가는 르포형 기사였다. 방의 주인은 ‘기억과 약속의 길’에서 방문객을 안내했던 성빈의 누나 가을 씨였다. “우리 가족은 4명이 전부 세월호에 매달려 있어요.” 그는 작년과 같은 말로 지난 시간을 회고하고 있었다. 당시 그와 우리는 “슬프다”라는 같은 단어로 감정을 표시했다. 하지만 그 후 2년이 지난 지금. 그는 2년 전과 같은 말로 슬픔을 표시했고, 나는 내 삶을 살았다. “슬프다”라는 말의 온도를 얼추 맞췄다 생각했지만, 말 그대로 ‘얼추’였다.
매년 4월 16일이면 나는 세월호에 ‘공감하는 척’을 한다. 이맘때면 노란 리본에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사진들이 카카오톡 배경화면에 나타난다. 그들과 비슷한 마음일 테다. 이를 보는 일부는 ‘1년간 아무것도 안 하다 4월 16일만 공감하는 척 한다’라고 말하며, 그중 일부는 ‘1년간 아무것도 안 하다 4월 16일만 공감하는 척 해 미안하다’라고 말한다. 나는 후자에 속하며, 전자와 같은 비판을 주변으로부터 받는다. 하지만 나는 나와 같은 후자의 사람들이 하는 ‘공감하는 척’의 가치를 믿는다. 나는 평생 ‘기억과 약속의 길’에서 만난 가을 씨의 “슬프다”는 말의 온도를 알지 못한다. 그저 그 말의 온도와 가까워지려 부단히 노력할 뿐이다. 또 이를 위한 유일한 수단은 ‘공감하는 척’ 외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