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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이 Nov 01. 2019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차분한 도발(스포포함)

영화를 보지 않고 흥분중인 당신에게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처음 출간될 당시 이 소설이 소위 말해 '대박' 분위기는 아니었다. 물론 잘 팔리는 소설이었고, 조남주라는 작가를 문학 독자들에게 각인시키기엔 충분할 만큼 팔리는 작품이었다. 소위 잘나가는 작가들의 소설도 10만 부 넘기 힘든 걸 보면 '문학빠'들 외의 일반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주변에 소개하기 시작하면서 이 책은 탄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문학적인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한 여성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겪어야 했던 문제들을 '르포르타주' 형식으로 현명하게 조명했다." 정도가 이 소설의 주 평가였는데, 오히려 문학적인 완성도가 떨어졌기에, 문학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 독자들에게, 주로 문학을 소비하지 않는 독자들에게까지 열광적으로 소비될 수 있었던 것 같다.


83년생 남자, 누나 둘 막내. 할아버지는 어머니가 누나 둘을 낳을 때 넘지 않았던 문턱을 막내아들인 내가 태어난 후에야 넘으셨고, 지금까지도 차별은 없었다는 어머니의 말에 누나들은 절대 긍정의 신호를 보내지 않는 가정. 부자도, 지지리 가난하지도 않았던 형편. <82년생 김지영>에 남자인 내가 공감을 표할 수 있었던 것은 소설 속 김지영네 가족과 우리 가족이 꽤나 닮아 있어서 였기 때문이었을까.


여성들이 <82년생 김지영>에 지지와 공감을 표하는 지점과는 좀 달랐지만, 소설을 읽고 83년생 남자 '나' 또한 소설에 지지와 공감을 표할 수 에 없었다. 당사자로서가 아닌, 가해자로서의 미안함에서 기인한 지지와 공감을. 소설 속 김지영네 막내 지석이와 내 포지션은 거의 유사했고, 설날 세뱃돈은 늘 공평하게 나눴다는 볼멘소리에 누나들은 늘 '그건 그거고, 이건 그것과 달라'라며 막내동생보다 적은 세뱃돈을 탔던 과거를 소환해 한숨을 짓곤 했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혜택을 받지 않았다는 말로는 누나들이 여성으로 보냈던 30년 넘는 시간을 보상할 수 없다는 것을 소설을 보고 더 깨닫게 됐다.


영화 제작을 앞두고 여자 주인공 '정유미' 캐스팅 소식이 인터넷상에 발표되었을 때, 기자들은 알아서 기사로 우려를 표했다. 앞다퉈 정유미의 인스타 계정에 몰려가 페미를 옹호하는 영화에 출현한다며 댓글을 다는 내용을 소개했고, 책을 들고 인증샷을 올리는 스타들의 인스타 계정에도 몰려가는 '한 무리'의 행태를 소개하느라 바빴다. 정유미가 김지영이라는 캐릭터를 잘 소화할 수 있는 배우인지에는 관심이 없고, 온통 김지영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 페미니시트와 반 페미니스트의 대립 구도를 심화시키는데 관심을 집중하게끔 유도 했다.


이 즈음 영화를 준비하고 있던 김도영 감독의 마음은 어땠을까? 영화를 보고 나서 감독의 마음이 조금은 읽혔다(물론 전혀 잘못된 해석일 수 있겠다). "이 작품은 이런 논란으로 폄훼될 수 없을 만큼 의미 있는 작품으로 만들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읽혔다. 감독은 논란을 최소화하고자 애썼고, 소설의 주제의식과 이미지를 충분히 차용하면서도 '가족'이라는 대한민국 공통 감동 코드를 영화 깊숙이 배치함으로 논란에 '영화나 보라'는 차분한 도발을 감행했다. (물론 영화를 보고도, '영화 보는 도중에 남녀가 싸우다 나갔다'라는 자극적인 기사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영화는 차분하게 전개된다. 대현과 지영, 그리고 26개월 된 딸 아영은 한 가족을 이룬다. 대현이 출근하고, 빨래를 돌리다 말고, 또 다른 집안일을 하다 말고 문득문득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지영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언제고 창밖을 바라보는 지영은 금새 아영의 호출에 창밖과 등을 돌린다. 대현은 육아로 인함인지 이상 증세(일종의 빙의)를 보이기 시작하는 지영에게 명절 여행을 제안할 만큼 자상한 남편이다. 그러나 지영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김지영' 자신 뿐이란 것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명절, 부산에 있는 시댁에 내려간 지영은 시어머니의 지나친 행동들에 자신의 어머니로 빙의를 해 시댁 식구들을 놀라게 한다. 친정 식구들 앞에서도 이상 증세를 보이는 지영은, 남편 대현 앞에서 종종 다른 사람이 되어 대현을 불안하게 하고, 결국 친정 엄마 앞에서 엄마의 어머니로 빙의(?) 해 엄마를 위로한다. 이제 가족들 모두 지영이 아프다는 사실이 알게 되고, 대현은 지영에게 지영이 자신의 엄마로 분해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영상을 틀어주고 비로소 지영은 자신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정신과를 찾게 된다. 어떤 평론가는 지영의 문제에 대해 사회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정신과를 찾는 개인적인 방법만을 소개했다며 안타깝다 평했다. '여기까지(정신과) 왔다는 것은 이미 치료가 시작되었다는 것'(대사는 부정확하지만 맥락상 유사함)이라고 말하던 지영의 담당의의 대사가 떠올랐다. 정신과에서 문제를 맞닥뜨리기로 결정한 것이 이미 사회적 시선을 거슬러 적극적인 해결을 모색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평론가는 간과한 것 같다. 정신과에서 상담 받는 것이 감기 치료 처럼 일상적인 것이 되어 가는 시대가 온다면 또 다른 김지영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런 와중에 지영은 동네 앞 빵 가게의 오전 아르바이트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고, 전 직장의 여성 상사가 창업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력 단절을 끝낼 수 있는 제안을 듣고 마음이 부풀기도 한다. 지영이 새롭게 일을 시작해 보려고 하는 장면에서 육아와 가사에 대한 진일보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독박 육아와 가사에 지친 피해자 여성의 삶을 조명했던 과거, 남자들은 방관자 혹은 적극적인 방해자로 등장했다. 물론 아무런 도움도 위로도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상파 일일 드라마, 주말 드라마의 육아에 무책임한 남자 캐릭터들은 일상적으로 등장하고, 평일 낮 라디오의 사연들은 주부들의 하소연이 주를 이루는 경우가 잦았다. 원인은 도와주지 않는 남편인 경우가 많았다. 남편을 원망한들 해결되는 것은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상황들만 만들어 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대현은 꽤나 사려깊은 남편이다.


아이들에게 엄마의 사랑이 필요하다며 아내들을 집에 눌러 앉혔던 과거의 아버지 세대 남편들과 달리, 대현은 건강이 좋지 않은 아내가 푹 쉬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아내의 아르바이트를 만류한다. 물론 지영이 집에서 푹 쉬었으면 좋겠다는 대현의 말에 집에서 아영이 보는 게 쉬는 거야? 라며 발끈 하긴 하지만, 대현의 걱정은 아영이에게만 머물지 않고 지영에게까지 친절하게 닿는다. 지영이 원하는 대로 했으면 했던 대현은 지영의 재취업으로 인한 공백을 자신의 육아휴직을 통해 채우려고 한다. 육아휴직 후 복귀한 동료들이 불이익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지만, 대현은 그 순간만큼일지라도 지영의 재취업을 자신의 경력단절로 보조해주고 싶었다. 과거 여성들의 독박육아에 대한 해결을 여성에게서만 찾으려고 했다면 이제는 남성들도 그 논의의 중심에 서서 함께 고민하게 되는 형태로 논의가 변화되고 있는 것을 영화에서 단적으로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남녀 갈등 혹은 페미니즘에 대한 진한 단서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다. 소설에서 사회적 사건들을 언급하며 82년에 태어난 김지영이 사회적인 불평등을 견뎌내야 했던 지난 시간을 조명했다면, 영화는 82년생이라는 조건을 옅게 처리하고 모든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일들을 여러 사람의 시선에서 감동적으로 다뤘다. 어느 한 계층(성별, 세대 등)을 대변하기 보다, 인생의 사연과 순간들을 잘 배치하며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고 걱정하고 고민하며 볼 수 있는 '82년생 김지영'이 되었다.


아직도 영화를 보지 않고 페미니즘 영화를 운운하는 일부 남자들이 적어도 이 영화를 보고 논지를 전개하길 바란다. 사안의 중심에 들어가서 이해하려 하지 않고, 앞에 걸린 조건과 현상들, 남들이 써놓은 비판적 휘갈김에 의존해 아무 말이나 쏟아내는 사람들을 우리는 '찌질하다'고 한다. 그 찌질함이 자신의 상황, 혹은 처지와 만나 분노로 표출될 때 누군가에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찌질함을 구사하는데 더 신중해야 한다. 여성에 비해 아무런 사회적 혜택을 받은 것이 없다며 여성의 인권 향상에 혀를 내두르며 비판하는 20대 이하 남성들도 보지 않을 이유가 하나 없는 영화다. 그만큼 이 영화는 우리 엄마 이야기이고 내 이야기 이고, 누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냥 '영화나 보시라!'


최근에 엄마가 수술로 입원하시게 되었고, 누나들이 병원비를 나눠 분담하기로 했다. 신혼인 막내는 열외라며 둘이서만. 퇴원하기 하루 전날. 엄마에게 물었다. "누나들하고, 나 차별한 거 알아?"라고.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나서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며 엄마를 지켜봤다. 엄마는 이내 언짢아하며 "그런 적 없어"라며 항변하신다. 하지만 이내 덧붙이는 내가 태어날 때의 에피소드들은 여러 지점에서 남녀 차별과 맞닿아 있다. 흘러가는대로 되는 대로 인생을 살았겠지만, 은연중에 받았던 남성으로서의 혜택들을 돌려주고 싶다. 누나들에게 엄마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그런 마음이 들게 하는, 지나치게 울컥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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