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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anni Jun 04. 2023

나는 왜 결혼과 임신을 선택했는가

단단한 철학으로 흔들리지 않기 위하여

그럼에도 나는 왜 결혼과 임신을 선택하였는가. 나는 이것을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나 스스로를 설득시키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만, 결혼해서 혹시 힘든 순간이 와도 아기를 낳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와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결혼과 임신이 당연한 것이었던 시대를 지나, 선택인 시대에 접어들었다. 나는 반골인 듯 규칙지향적인 모순 가득한 사람으로, 결혼과 출산제도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제도권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한편으로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손에 꼽는 화목한 가정에서 나고 자랐고, 엄청난 부자는 아니어도 경제적 어려움 없이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왔다. 가족에 대한 긍정적 경험과, 최소한의 경제적인 비빌언덕이 있을 때 우리는 결혼/임신을 ‘선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선택하기 어려운 것은 ‘잃을 것은 구체적’이나 ‘얻을 것은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1. 결혼과 임신, 잃을 것과 얻을 것(으로 예상되는 것)


잃을 것은 내가 현재 누리고 있는 것이다. 싱글라이프, 경제적 여유, 삶의 재량권 등. 선택 전에는 언제든 마음먹으면 해외여행도 갈 수 있고, 원한다면(?) 당장 퇴사할 수 있다. 하지만 결혼을 하는 순간, 이러한 권리는 절반으로 줄어들고, 아이를 낳는 순간 그 모든 것은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안돼!)


얻을 것은 아직 누려보지 못해서 예측만 가능하다. “안정감, 관계가 줄 수 있는 행복”.. 또 무엇이 있는가?! 그 역시 확률게임이다. 내가 배우자를 잘못 골랐다면, 아이가 여러모로 문제를 갖게 된다면..? 얻을 수 있는 것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선택을 안 하는 것은 너무나 합리적이다. 가족의 좋은 경험과 경제적 기반을 갖는 것도 쉽지 않은 시대에, 잃을 것은 눈에 보이고 얻을 것은 확률게임이라면 이 모든 것이 게임의 일부였다면, 결혼/임신이라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을까..?


그럼에도 나는 왜 결혼과 임신을 선택하였는가. 나는 이것을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나 스스로를 설득시키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만, 결혼해서 혹시 힘든 순간이 와도 아기를 낳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와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2-1. 그럼에도 결혼을 선택한 이유


결혼 전에 이런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나는 결혼이 하고 싶다. 그런데 왜..?


20살 때 서울로 상경하고 10년 넘게 혼자 살면서, 사람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외향인이라 하루도 빠짐없이 사람들을 만나러 돌아다녀도, 숨길 수 없는 가시가 돋아나는 듯했다.


사람의 온기가 필요했다. 누군가와 같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이유라면 꼭 이성일 필요는 없다. 세상엔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있다. 주변을 보면 친구끼리 함께 살기도 하고, 나이가 들더라도 할머니 세 분이서 서로의 보호자와 동료가 되어주며 함께 사는 삶의 형태도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반영해서 올 4월에 드디어 "생활동반자법" 이 발의되었다고 한다(짝짝짝)


그런데 왜 이성이어야 하는가? 이유는 명확했다. 아기를 낳고 싶어서. 그러려면 1) 생물학적으로 이성이 필요하고, 2) 결혼을 통해 제도권에 들어가는 것이 내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2-2. 게다가 임신을 선택한 이유


그렇다면 왜 아기를 낳고 싶은가? 여기서부터는 아무리 고민해봐도 비논리의 영역이다. 그냥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닮은 아기를 갖고 싶었다. 삶이 힘들고 벅찰지라도, 그 속에서 감사함을 찾는 삶의 태도를 알려주고 싶었다. 힘들고 지지고 볶고 싸우더라도, 그것이 가져다줄 것만 같은 행복의 "환상"이 나를 압도했다.


그 환상은 이상주의자적인 내 특성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사회화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인류보존을 위하여 출산은 필수불가결이니까(그렇게 치면 본능도 무시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내가 살아온 30년 넘는 삶의 단편, 단편의 축적이 이러한 결정을 내리도록 했을 수도 있다. 삶이란 어마어마한 복합적 선택의 결과이기에, 아주 명확한 논리적 근원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알고 있다. 나는 내 욕망에 충실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결혼했고, (예상보단 좀 많이 빠르지만) 임신했다.

- 우리는 2년 뒤 임신을 계획했고, 결혼 4개월 만에 갑작스레 아이의 존재를 확인했다. 확인 당시 아기는 벌써 8주, 팔다리가 조금씩 나와있고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남들보다 한달정도 늦게 알았달까?)


아가의 심장소리는 가슴벅찬 소리이다. 정말로 한 생명이 내안에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3. 그래서 얻은 것? (흔들리지 않기 위하여)


그래서 무엇을 얻었는가? 일단 다행히 좋은 남편과 결혼하여 혼자살 때 느끼지 못했던 행복과 새로운 형태의 사랑을 경험하고 있다. 확실히 연애할 때의 사랑과는 또 다른 어떤 모양이다(더 깊거나 진하다기보다는 그저 다른 형태, 그런데 좀 더 좋은 형태이다.). 임신을 하고 나서, 우리는 또 다른 관계가 되었다. 아이라는 존재가 우리 사이를 더 강하게 연결해 주고, 그 사이에서 생겨난 마음의 유대는 또 다른 더 좋은 사랑의 형태를 가져다주었다. 현재까지는 결혼하기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https://brunch.co.kr/@myannni/39


임신을 하고 나서는 무엇을 얻었는가? 솔직히 많은 걸 잃었고, 힘들고 사회에 대한 분노가 넘쳐흘렀다. 이는 한국사회가 풀어야 하는 수많은 문제의 복합이라고 생각하며, 사회적으로 제도적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한국에서의 임신은 행복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차차 풀고자 한다.


https://brunch.co.kr/@myannni/40


임신으로서 갖게 되는 불만을 토로할때마다 사실 조심스러워진다. 아이를 갖고자 수없이 노력하고 눈물 흘리는 분들이 내 주변에도 많다. 그들이 눈물 흘릴 때, 나는 임신한 자로서 괜히 미안하고 또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음에 슬프다. 하지만 그러기에 임산부로서의 고통을 더 널리 알리고자 한다. 그들이 어렵게 임신에 성공했을 때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배려받으며 지낼 수 있게.


사회와 개인의 문제를 떠나서,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 본다. 혹자는 아이를 갖는 것은 부모만을 위한 이기적 결정이라고 한다. 아이가 결정해서 세상에 나오는 것은 아니니까. 누군가는 비혼이지만 입양을 한다. 양육은 삶에 대한 회의를 막아주고, 삶에 목표를 얻도록 해준다고 한다. 결국 개인의 삶이라면 개인의 가치판단의 영역이 상당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혼을 선택하고, 커리어를 발전시키며 생산적인 삶을 꾸려가는 이들을 보며 솔직히 욕심이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나 역시, 항상 수많은 대외활동과 약 10년 가까운 독서모임 생활과, 대학원 생활을 거쳐 열심히 살아왔으며 사실 하반기에 오래 미뤄오던 박사학위에 드디어 지원하려던 찰나였다.

- 결혼과 출산 사이 2년의 기간을 갖기로 한 것도, 나는 박사학위 코스웍(수업만 듣는 기간으로 2년 정도 소요)을 남편은 준비하던 전문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 모든 것이 어그러졌던 첫 순간에, 갑작스러운 임테기 두줄에 나는 기쁨보다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건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이의 존재를 확인한 뒤, 그 모든 것이 뒤로 밀려남을 경험했다. 우리 부부에겐 아기의 건강과 안전이 모든 사건의 첫 번째 이슈로 등극했는데 그것은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설마 말도안돼 진짜? 오빠 일어나봐!!! 다급했던 새벽 여섯시 반


그러면서도 동시에 밀려오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학위도전이 지연되고, 기획실로 들어가서 한창 재밌게 일을 배우며 시야가 넓어지던 시기였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



뻔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 게 사실이다.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아이를 가짐으로써 얻는 행복을 바랐던 것도 사실 아닌가. 타인의 비출산 선택에  아쉬움과 억울함과 부러움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만 거기에 파묻히는 순간 나는 불행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삶을 지켜내야 한다.


단순히 아이를 가진 행복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양육과 동시에 내가 바라던 것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내 커리어를 발전시키고, 원하던 것(학위)에 어떻게든 도전할 것이다. 나의 조각을 떼어내면서 까지 양육하게 된다면 종국에 나는 아이를 내 트로피 삼아 대리만족 하거나, 최악의 경우 아이에게 원망을 하게 될 것이다.



단단한 철학이 있어야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남에 대한 부러움은 어떤 영역에서든 끝이 없지만 내 분야에서 내가 성공할 때 남들 역시 그 모습을 부러워한다. 또한 나는 아이를 가짐으로써 이미 어떤 부분에서는 성공했을 수도 있다.


동시에 나는 내 삶을 사랑할 것이다. 아이를 사랑하는 만큼 나를 아껴줄 것이다. 그럼으로써 단단하고 멋지게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결혼과 임신을 선택한 나 스스로에게 미안해하지 않는 길이다. 그리고 이 글은 나 스스로를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도록 다짐하는 글이다.


열심히 살기위해 시작한 것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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